물건이 오래되면 ‘낡은 것’이라고 하지만 생명이 오래되는 것은 ‘늙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을 ‘늙은이’ 혹은 ‘노인’이라고 한다. 노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 ‘어르신’이다. 원래 어르신이란 말은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으나 최근 한국사회에서 어르신이란 말은 일반명사화되어 지자체의 행정부서 명칭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어르신 복지과에서부터 어르신 돌봄 팀, 어르신 건강증진팀, 심지어 어르신 장사문화(장례)팀까지 두는 지자체들이 적지 않다. 노인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노인은 ‘보호대상자’라는 생각이 깔렸다. 그래서인지 ‘아동 청소년’을 한데 묶어 ‘어르신 아동청소년과’라는 부서를 둔 지자체도 많다.전통사회에서 노인이란 존경과 공경의 대상일 수 있었다. 인생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도 상대적으로 많았고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함이나 지혜도 많았다. 노인의 경험과 지혜는 마을의 갈등이나 어려움을 해결하는 원천이었다. 한집안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안 내 크고 작은 분쟁과 갈등을 조정하는 것은 집안 내 연장자의 역할이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지구촌화 시대에 노인의 경험은 우물 안 개구리 정도로 폄하되기 일쑤다. 바쁘게 변하는 사회에서 노인은 ‘세상 변한 지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세상 넓은지 모르고, 매사에 서툰 사람이 노인이다. 그래서 입 다물고 눈 감는 것이 노인의 미덕이 된 지 오래다. 과거에 노인이 입 다물고 눈감고 있었던 것은 집안과 마을의 화합을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뭘 모르니까 잠자코 있어라’는 젊은이들의 강요에 의해서다. ‘어르신’으로 돌볼 테니 그냥 있으라는 것이다. ‘늙은이’로서가 아니라 ‘낡은이’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제 허울뿐인 ‘어르신’이란 말을 거부해야 할 때다.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을 스스로 돌보는 주체로 나서야 할 때이다. ‘어르신’이 아니라 먼저 살아온 ‘선배 시민’으로서 ‘후배 시민’에게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지난 백 년, 짧게는 칠팔십 년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만큼 선배들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은 미래를 살아가는 후배들을 위한 소중한 자산 일 수 있다. 극심한 경쟁, 구직 등으로 힘든 세월을 겪는 후배 젊은이들에게 ‘낡은 경험과 지식’으로 훈계하는 꼰대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어려움과 하소연에 공감하고 그들을 돌보는 선배의 역할이 필요한 때이다. 노년에 경계해야 할 것을 기록한, 소노 아야꼬의 『계로록』(戒老錄, 한국어 번역 『나는 이렇게 늙어 가고 싶다』)은 ‘낡은이’로서가 아니라 ‘선배’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준다. 여기에 몇 가지 내용만 소개하고자 한다. - 남이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노인이라는 것은 지위도 자격도 아니다. -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해져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귀찮아도 많이 걷고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건망증이나 다리나 허리의 불편함을 변명하지 않는다. -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거짓으로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 “됐어”라고 사양하면 젊은 세대들은 주지 않는다. “나도 먹고 싶은데 하나씩 돌아가나?”라고 말해야 한다.- 생활의 외로움은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 낯선 동네를 혼자서 산책할 수 있는 고독에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돈이면 다’ 라는 생각은 천박한 생각이다. 돈은 노후에 중요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세상을 너무 황량하고 냉정하게 만든다.- 훈훈한 노후를 위해 중요한 것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사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란 없다. - 노년의 가장 멋진 일은 사람들과 화해하고 베푸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