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생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은 반복적이다. 해가 뜨고 지는 하루가 그러하고 춘하추동과 같은 계절의 순환이 또 그러하다. 반면에 인간의 역사는 순환의 시간이 아니다. 직선적이어서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시간이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다를 바 없지만, 숫자를 더해 날짜를 구분하고, 작년의 해와 올해의 해가 다를 바 없지만 2018년과 2019년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어제와 다른 오늘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모색하는 인간들의 노력을 우리는 역사의식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역사를 생각할 때 2019년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해이다. 1919년에 일어난 삼일운동 백 주년의 해이기 때문이다. 백 년 전 남녀노소 방방곡곡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던 그 절박했던 마음들을 상기하면서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자리를 돌아볼 때가 된 것이다. 근년의 일만 살펴보더라도 세월호 참사, 최순실 국정농단, 촛불항쟁과 박근혜 퇴진, 북한 핵과 전쟁 위기 등 역사적 사건들이 떠오른다.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해서 삼백 명이 넘는 승객이 사망한 세월호 사건의 과정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라는 절망의 탄식을 내뱉었다. 최순실이 무능한 대통령을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한 일이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이제 시민은 더는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스스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파면되고 국민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는 일과 더불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일은 문재인 정부에 주어진 역사적 과제다. 적폐청산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우리 사회의 전 부문에 걸쳐 누적된 폐습이 좀 많은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적폐를 청산하는 일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의 내용과 방향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적폐청산이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거나 특정대상을 겨냥하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적폐청산을 두고 ‘내로남불’이니 ‘공수교대’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적폐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릇이 깨지면 흔히 사람들은 그릇을 깬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한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태를 해결하고 두 번 다시 그릇이 깨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깬 사람을 찾는 일 못지않게 ‘무엇’이, ‘왜’ 깨어졌는지, 그리고 깨진 그릇에 다친 사람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적폐의 문제 또한 그러하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청산해야 할 적폐는 ‘무엇’의 문제이지 ‘누구’라고 하는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경쟁자를 ‘적’으로 보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문재인 정부의 탄생에 환호와 기대 찬 박수를 보냈던 것은 진보라는 이념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고난과 인간적 아픔 속에서도 따뜻함과 정치적 품위를 잃지 않았던 문재인 대표의 인품에 대한 기대였다. 이념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아픈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대통령에 대한 기대였다.그간 우리는 많은 아픔을 견뎌왔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무자비한 독재 권력의 폭력에 의한 오래된 상처만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때 느꼈던 ‘살아 있음’에 대한 부끄러움,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일부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무능과 뻔뻔함에 대한 분노는 우리 각자의 가슴에 아픔이 되어 쌓여왔다. 무위당 장일순(1928-1994) 선생은 “눈물겨운 아픔을 선생이 되게 하라”고 했다. 그렇다. ‘내로남불’의 적폐청산이 아니라 지난 세월 우리가 모두 겪어야 했던 역사적 아픔을 선생으로 삼는다면 비로소 그때 아픔이 길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열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