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익숙한 존재는 느끼지 못하거나 망각하기 쉽다. 공기나 물이 그렇다. 모든 생명에 절대적이지만 으레 있으려니 한다. 인간사에서도 비슷한 존재가 있다. 가정이다. 너무 소중하지만 늘 곁에 있으니 느끼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버는 직장, 나와 다름이 분명한 타인과 부대껴야 하는 사회, 지구 상의 분쟁과 경쟁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가 주는 느낌과는 비교된다. 친숙하다고 해서, 중요하다는 느낌이 덜 든다고 해서 절대로 홀대할 수 없는 대상이 가정인데도 말이다.산과 들이 짙푸른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 5월은 생동의 계절이자 가정의 달이다. 가정의 달은 UN이 1989년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지정한 데서 출발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가족 형태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크게 변하는 산업화 시대를 맞아 가족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관심과 의식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우리나라도 1994년 ‘가정의 날’ 행사를 시작했다. 10년 뒤인 2004년 건강가정기본법이 제정되면서 5월은 ‘가정의 달’로 공식화됐다.5월에는 가정과 연결되는 기념일이 많이 몰려 있다.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입양의 날(11일), 스승의 날(15일), 세계인의 날(20일), 부부의 날(21일), 성년의 날(21일)이 있다. UN이 가정의 달을 지정한 때는 산업화로 인한 개인주의와 핵가족화, 군중 속의 고독이 만연한 시대였다. 지금은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이 나라와 저 나라가 혼재하는 다층적 구조가 특징인 시대다. 글로벌화와 네트워크의 발달은 가정의 단위를 지역과 국가에서 지구촌으로 넓혔다. 스마트폰과 AI(인공지능)로 대표되는 IT(정보기술)의 발달은 참여·연대와 함께 고립을 확산하는 양상이다. 가정의 개념이 다기화·다원화·복잡화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 만큼 가정은 더욱더 소중하고 큰 가치를 갖는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5월의 기념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세계인의 날’이다. 우리는 더는 백의민족·단일민족이 아닐 수 있다. 생활수준이 크게 높아지면서 백의(白衣)는 여러 가지 옷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바꿨다. 글로벌화와 농촌지역의 신부 기근 현상은 다문화 가정을 급속하게 늘렸다. 2007년 시작된 ‘세계인의 날’에는 이런 시대적 상황이 투영됐다. 다양한 민족과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취지다. 다문화 가정 31만 6천 가구(2016년 말 통계청 기준)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정이 안착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된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가정을 규정하는 개념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N포 세대는 취업이 되지 않아서 연애와 결혼은 물론 주택구매 등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 세대다. 이들에게 1인 가구는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부가 생물학적 유전자를 이어받은 후세를 만드는 곳이 가정이라는 고전적 시각에서 보면 가정의 파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1인 가구도 가정임을 웅변하고 있다.초고령 사회를 맞아 9988(99세까지 팔팔하게)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그렇지만 장수 시대라고 해서 모든 부부가 해로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식들의 부모 공양이 더는 도덕률이 아닌 터에 혼자 사는 노인들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복지 제도가 대폭 확충됐다고 하지만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복지의 사각지대는 있게 마련이다. 복지 그물망이 빠뜨린 사회적 배려 대상자들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하다. 2018년 가정의 달은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시대적 변화에 걸맞게 가정의 개념을 확대 재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에 시야가 갇히면 쇠락과 붕괴는 시간문제일 수 있다. 가정의 개념에 1인 가구, 홀몸 어르신, 사회적 배려 대상자들이 모두 포함돼야 우리 사회는 비로소 건강한 사회, 성숙한 사회, 바른 사회로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