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가 남긴 작품 가운데 <소의 머리>가 있다. 얼핏 보면 별것 아닌 조형물이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가져다가 적당히 연결한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경매에서 무려 3백억 원에 팔렸다. 물론 피카소라는 이름 때문에 매겨진 가격이지만, 그 가치는 그의 비범한 발상력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버려져 있는 자전거는 주변에서 쉽게 발견되지만, 그 부품들에서 소의 머리를 상상하는 것은 별난 재능이다.현대미술에서는 대상을 충실하게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고 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리나 마그리뜨 등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시각적 조크’라고 할까. 경험이나 세상을 포착하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유머러스하다.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사물을 표상하는 것,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인데 그렇게 존재하는 듯 바라보는 것이다. 유쾌한 미적 경험에는 획기적이고 특유한 관점이 깔린 셈이다. 그렇듯 비범한 통찰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랑스어에 ‘Tu as raison’이라는 표현이 있다. 영어로 직역하자면 ‘You have a reason’이 되겠는데, ‘네 말이 맞아’라는 가벼운 긍정의 표현이다. reason은 ‘이유’라는 뜻이니까, 한국어의 ‘일리(一理)가 있어’라는 표현과 같은 발상이다. ‘그거 말 되네!’라는 말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거나 간과하고 있던 것을 상대방이 포착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독특한 관점이 설득력을 지닌다는 뜻이다.상투적인 생각과 피상적인 인식을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관찰’이다. 화가 앙리 마티스는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노력을 요구하는 창조적 작업이다.’고 했다. 보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탐색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라는 말이다. 예술가들이 늘 하는 작업이고, 시인들 역시 그런 눈을 갖고 있다. 하상욱 시인의 「모기」를 보자. ‘원하는 건 / 가져가 // 꿈꾸는 건 / 방해 마’ 보통 사람들은 모기가 눈에 띄면 때려잡기에 급급한데, 시인은 동등한 생명체로서 살아갈 권리를 인정하며 공존의 길을 제안하고 있다. 시적인 발상은 똑같은 현상이나 경험에서 의외의 것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준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유강희 님의 동시 「차가 지나갔다」이다. ‘웅덩이가 / 날개를 / 편다’ 빗물 고인 웅덩이 위에 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누구나 쉽게 접하지만, 거기에 새의 날갯짓을 연결하는 상상력은 아무나 발휘할 수 없다. 습관적인 시선에 갇히지 않고 어린아이가 세상에 처음 눈길을 보내듯 경험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한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한다면, 평범한 사물 하나를 눈앞에 두고 한참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떠오르는 단어와 이미지를 나열하거나 마인드맵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그 작업을 여럿이 함께하면서 그 결과를 나누면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대상을 다각적으로 들여다볼 뿐 아니라, 그 안에 함축된 의미를 끝없이 캐낼 수 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 거기에 있다.‘상자 바깥에서 생각하기’ 창의성을 한 마디로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데, 일정한 틀로만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의 관성에서 의식적으로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세 가지 <찰>을 통해 실행할 수 있다. 우선 <관찰>인데, 이것은 우리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잠재력에 접근하는 중요한 통로다. 그것은 반짝이는 <통찰>로 연결되어 리얼리티에 대한 참신한 직관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이 깔려 있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내면 작업이 필요하다. 거기에 비춰지는 상(像)들을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타인과 세계를 드넓게 이해하는 눈이 뜨인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텅 빈 공간이 열리고, 시적(詩的)인 각성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