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내 기억을 못 믿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글을 쓰면서 어떤 문장을 인용하고 싶을 때 대충 내용은 알았는데, 정확한 문장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잦다. 그렇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도 그런 경우인 것 같다.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문장은 “과거의 규칙은 더 이상 맞지 않고 새로운 규칙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이 문장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흔히 경험하고 있는 혼란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청장년기를 보낸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관혼상제를 알리는 범위나 방법에서부터 새로 이사 갔을 때 이웃에게 인사하는 법도 과거와 같지 않다. 그렇다고 사회구성원 다수가 합의하고 있거나 지금의 청장년들 간에 통용되고 있는 ‘새로운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좋게 보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무엇인가 만들어지는 도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을 보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일상적으로 겪는 혼란을 잠깐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윗사람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경우 전화를 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문자를 먼저 드려서 전화 가능한지를 여쭤 보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내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제각각 다른 답이다. 어떤 이들은 아랫사람이 사전 통보 없이 전화부터 하는 것을 예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랫사람이 문자를 보내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옛날 같으면 인편으로 알릴 일, 편지로 알릴 일, 전화로 알릴 일에 대한 구분 정도에는 대강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직통보’조차도 문자로 보내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젊은이 중에서는 자신들이 해직통보를 받거나 별로 좋지 않은 일을 통보받아야 할 때 문자로 받는 것이 가장 좋고, 인편으로 통보받는 것이 가장 싫을 것 같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이런 반응을 보면서 나는 내심으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나는 학위논문 심사에 통과하지 못해 불합격을 통보하거나 장학생에 선정되지 못한 학생들에게 결과를 알려줘야 할 때 늘 직접 만나 얘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나로선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에 대한 일종의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당사자들로서는 그 반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난감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런 종류의 혼란이 꼭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결혼해서 자식이 생겼을 1980년대 말 당시 나는 “부모 앞에서 제 자식 예뻐하는 것 아니다”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혹시 부모님들이 느끼실 소외감을 배려하는 자식의 예의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집에 오시면 나는 우리 애들을 조금 거리를 두고 대했다. 그것을 두고 집사람은 무척 서운해 하고 내가 ‘경상도 남자’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내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집사람의 생각이 짧은 것이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또 어떤 때는 내 태도가 ‘요즈음 시대에 맞지 않는 소위 옛 효도법의 잔재’라는 반성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모든 것이 변한다. 인간사의 예법이나 가족 간의 예절도 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과거의 관점으로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식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관용 또한 선배로서의 중요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고 좋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하되 좋게 변화해야 할 것이며 나쁘게 변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좋은 변화라 하고 나쁜 변화라 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변화와 나쁜 변화의 기준은 ‘불변수연’(不變隨緣)의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불변이란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수연이란 시절인연과 상황에 따른 변화를 의미한다. 요컨대 예의나 예법은 변하지만, 거기에 담긴 본래의 정신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본래의 정신이란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일 것이다.
세월에 따라 존중과 배려의 방식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지만, 변화하는 가운데 존중과 배려의 정신이 실종된다면 아무리 그 변화가 그럴싸하게 보여도 그것은 나쁜 변화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으로 요약되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사의 많은 일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살고 있지만 이런 때일수록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은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불변의 원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