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 이후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페스트’는 1947년에 출간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카뮈의 대표작이다. 오래전 읽어서 세세한 내용이 가물가물하던 차에 이 책을 다시 읽어 보았다.
페스트가 퍼져 봉쇄된 도시 오랑은 그 자체로 감옥이 된다. 왕래가 금지되고 가족이나 연인과도 떨어져 죽음의 공포를 견뎌야 했던 오랑 시민, 페스트는 신의 징벌이라고 설파하는 신부, 이 혼란을 틈타 사욕을 챙기는 범죄자 등 이 책은 페스트가 장악한 삶의 면면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시민이 자원보건대를 조직해서 환자이송과 방역, 시체매장 등을 담당하고 페스트의 변이가 나오는 등 현재의 코로나 사태를 그대로 그리고 있는 듯하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번 독서에서 나의 눈길을 끈 건 의사 리외가 늦게까지 환자들을 돌보고 돌아와 오랑시민을 응원하는 라디오를 듣는 대목이었다.
“세상 저 끝에서부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우정 어린 목소리가 연대감을 표현하고자 애를 쓰고 있었고…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고통을 진실로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가혹한 무력감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중략)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있습니다”라는 소리에 리외는 “그러나 함께 사랑하고 함께 죽겠다는 건 아니지, 그럴 수밖에. 너무 멀리 있으니”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는 ‘공감의 시대’라고 할 만큼 공감력이 중요시되고 있다. 가족관계는 물론 직장생활에서 실력이나 지능보다 더 확실한 성공의 지표로 꼽히기까지 한다. 공감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로 들린다.
위의 대목을 읽으면서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이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나는 얼마큼 아파야 공감하는 것인가, 아픔을 느끼는 것으로 공감은 완료된 것인가. 고통을 겪는 타인이 내 눈에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의 공감은 무게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자신이 공감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약자에 대한 폭력과 학대사건들을 보면 우리의 공감력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의 사랑과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는 어린 아이들에 대한 학대, 계급이나 직급을 우선하는 군대나 이와 유사한 조직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신체적 폭력행위를 접할 때 맨 처음 드는 생각이 바로 이 ‘공감’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공감’이 감정의 차원에 관한 것이라면 ‘페스트’에 등장하는 자원보건대는 ‘공감’을 넘어선 행동을 말하고 있다. 이들이 절망 속에서도 페스트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 해야만 할 일을 내가 할 수 있기에 하는 것이다.
의사인 리외는 의사가 해야 할 일이고, 자신이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기 때문에 돌봄을 행한다고 말한다. 여행객인 타루도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며 그 목숨을 구하는 일이기에 봉사단을 조직하고 방역에 참여한다. 그는 이 일이 영웅주의와는 무관한 인간으로서의 품위 문제라고 말하며 이것만이 페스트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적 도리라는 이 말은 인간다움의 다른 말이며 ‘공감’의 동사형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로 마음과 몸이 꽁꽁 묶인 채 1년 반이 넘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백신접종이 진행되고 이 시간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는 공감력과 인간적 도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바를 다시 다짐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