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헷갈리는 일이 다반사다. 판단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이래도 응, 저래도 응’하는 목낭청(睦郎廳)이 생겼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나온 거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나오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구절은 골치 아프게 판단하지 말고 싶고 편하게 살자는 권유다.
양심과 도덕과 법률을 보자.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했다. 도덕은 타인과의 관계나 집단에서 규정되는 측면이 강하다. 양심에 이르면 비로소 자신의 내면과 긴밀하게 맞닿는다. 그래서 ‘도덕적이면 양심적이다’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많은 변화와 수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시장 경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자본과 시장은 최상위 가치를 차지하는 것인가.
자본과 시장은 도덕적일 필요도, 양심적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도덕과 양심은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기 쉽다. 자본 축적은 합법적이면 그만이다. 시장은 구성원의 뜻과 게임의 룰에 적합하면 된다. 시장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이윤이다. 이윤이 모이면 자본이 된다. 그러니 양심과 도덕쯤은 시장 한편에 놓아두어도 무방하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의 3기 신도시 땅 투기로 세상이 시끄럽다. LH에 대한 비판과 원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다.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자 정권과 정치권도 비난 대열에 합세했다. 택지개발 및 주택공급을 업으로 하는 LH 직원들이 땅 투기를 했다는 사실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는 분노로 이어졌다. 그 분노는 주택가격 폭등과 맞물리면서 스노우볼처럼 덩치를 키워가고 있다. 스노우볼은 동시 다발적으로 생기더니 정권을 비롯해 여러 곳을 향해 무섭고 빠르게 돌진하는 모양새다.
MZ세대의 분노가 더욱 크다고 전해진다. MZ세대는 1980년대 초~2000년대 초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에 태어난 Z세대의 합성어다. 이들은 취업난을 몸으로 겪었다.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접고 있다. 여유로운 삶을 위해 혼자 살겠다는 숫자도 적지 않다.
MZ세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정이다.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극심한 경쟁이 가져온 결과일 수도 있다. 공정하지 않은 경쟁이 공정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인식은 공정의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을 터다. 이런 MZ세대의 눈에 LH 직원들의 땅 투기가 어떻게 비춰질 지는 명약관화하다. 분노를 폭발시킨 기폭제가 됐다.
공정은 판단의 잣대를 바꾸는 힘을 갖는다. 법과 제도에서 정서와 감정으로의 이동이다. 정서와 감정에 반하는 모든 현상은 불공정의 범주에 고스란히 포함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옳지 않다면’,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공정하지 않은 거다. 적법한지, 시장에서 적절한 룰과 프로세스를 거쳤는지는 그 다음의 문제다.
직원들의 땅 투기가 이번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사회 곳곳에 비슷한 사건이 존재할 개연성도 충분하다. 직업에서 얻은 정보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는, 걸리지만 않으면 문제 되지 않는다. 남들이 모르거나, 남들보다 빨리 알게 된 정보는 막대한 재산을 챙길 수 있는 지름길이다. 뉘라서 모른 척할 것인가.
한국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나라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는 MZ세대가 입을 모아 얘기하는 공정이 전제돼야 한다. 그래야 건전한 경쟁이 이뤄지고, 모두가 수용하는 결과가 도출된다. 공정은 법제 준수와 직과 업에의 충실함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대학과 중용에 실려 있는 신독(愼獨)은 그래서 중요하다. 혼자 있어도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는 신독.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진 신독의 총합은 공정에 다름 아니다. LH 사태로 시끄러운 요즈음, 신독을 다시금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