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른 일에 종사할 때도 ‘상생’이나 ‘상호의존’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는데, 새마을에 와서는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추구하는 공동체의식을 높이는 핵심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은 존재 의미가 없지요. 독일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 자체는 없다. 오직 ‘나와 너’일 때의 ‘나’, ‘나와 그것’일 때의 ‘나’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결국 인간은 어떤 관계 속에서의 ‘나’가 의미를 부여받는 것입니다.
일찍이 달라이 라마는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모두가 공감하는 구호가 되었지요. 세계보건기구(WHO)의 어느 간부도 “우리는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로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두 분의 얘기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는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덕경>을 해설한 최진석 교수는, 유무상생은 유는 무를 살려주고 무는 유를 살려준다는 것인데, 유가 유인 것은 유 자체 때문이 아니라, 무의 관계 속에서 유가 된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똑같이 무도 무 자체 때문이 아니라, 유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무가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와 다른 견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군의 학자들은 개별의 고유한 본질을 더욱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물의 원리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라고 생각할 때, 상생이란 자신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상호의존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도생을 시도한다면 경쟁이 심화되고 갈등과 분쟁이 격화되겠지요. 그래서 상대와 나를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경제에서도 ‘함께 벌고, 함께 나누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이웃이 더 잘 살아야 나도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국가 간 분쟁은 존재하지만, 모든 나라들이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은 베트남 출신 틱낫한 스님의 글에서 잘 나타나 있지요. 그분은 “만일 당신이 시인이라면, 당신은 이 종이 한 장 속에 구름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나무가 자랄 수 없다. 나무가 없으면 우리는 종이를 만들 수 없다”라고 설명을 하였지요. 구름과 비, 비와 나무, 나무와 종이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존재는 두 측면이 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한 사람의 인간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일원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을 공동체의 우위에 두고 있지요. 그러나 위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강조한다면, 공동체 이익이 자신의 이익과 결부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타인을 배려하면 그 이익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이웃을 파괴하면 바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상생과 상호의존의 원리가 적용되고, 그것은 바로 공동체의식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은 공동체운동을 통하여 상생과 상호의존의 원리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