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갑부 중 한 명인 워런 버핏 역시 소통 의 귀재로 유명합니다. 워 런 버핏의 소통 방식은 손에 잡히게, 상 대가 아는 이야기로 대화한다는 것입니 다. ‘가령’과 ‘예를 들어’ 등을 말머리로 끌어내어 상대의 경계심을 늦추고 객관 적임을 암시하는 용법을 쓴다는 것이지 요. 이렇듯 소통은 자신의 의지와 마음가 짐뿐만 아니라 표현하는 방식이나 요령 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갈등은 오해와 불신에서 비롯 됩니다. 노사 간·세대 간·상하 간뿐만 아 니라, 평소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간에도 사소한 오해가 걷잡을 수 없는 갈등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지요. 언젠가 전 직장에서 한 직원이 저에게 이메일로 ‘이유 있는’ 항의(?)를 해온 적 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는데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시더니 오늘은 저한테 한마디도 안 하시더군요. 그래서 많이 서운했습니다”는 요지의 메 일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직원에게 아 무런 선입견이 없었고 누구인지 얼굴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마 그 직원과 엘리베 이터를 탔을 때 다른 생각에 골몰하여 표 정이 굳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 다. 사정이야 어떻든 저의 배려 부족임이 틀림없었고, 소통으로 오해를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소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 지요. 정책의 이해를 위해서는 시민과 공 직자가. 직장의 사기를 위해서는 직원과 간부가. 노사 화합을 위해서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또 가정의 화목 을 위해서는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소 통을 해야 합니다. 공익을 위해서는 ‘소통 은 곧 양보’가 아니기 때문 에 대화의 과정에서 원칙 을 지키면서 오해를 풀어 주는 한편, 타당성에 대한 반복적이고 섬세한 부분까 지의 설득 노력이 필요합 니다. 소통의 리더십을 가진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황희 정승 발탁 시 반대하는 신 하들이 많았는데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 하고 다독이며 밀고 나갔지요. 만일 당시 에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와 만류를 그대 로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문 자 한글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목표를 정할 때까지는 끊임없이 의논하 고 토론하나, 결론이 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세종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큰 교 훈이 됩니다. 위에서 얘기한 세종대왕이나 워런 버 핏이 소통의 달인이라 할지라도 ‘기술’만 으로 소통을 원활히 했던 것은 아니었겠 지요. 진정성과 상대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요? 따라서 소통의 전제조 건은 역지사지의 자세와 쌍방향 대화의 작동에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만 선택 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소통을 가로막는 저해 요인일 것입니다. 입장의 차이는 ‘틀 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각의 숫자는 지구 촌 총 인구의 숫자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 다를 수 있고, 생각 자체가 변할 수도 있습니다. 원활한 소통 과정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생각과 주장을 일부라도 수용 하게 된다면 이는 자연히 합의의 실마리 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