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삶이나 한 국가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일은 ‘바르게 판단하는 일’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린 때도 있다.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판단의 옳고 그름을 그 결과만 놓고 얘기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르게 판단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일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진정한 의미는 최선의 노력을 다 했을 때만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장애하고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동서고금 성현들의 말씀을 참고 해보면 결국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욕망이다. 욕망이 바른 판단을 장애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돈에 눈이 멀었다’든가 “욕망에 눈이 멀어서”라고 하는 말은 바로 욕망이 우리의 바른 판단을 장애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재물이건 명예이건 혹은 성적인 것이건 일단 욕망에 사로잡히면 욕망을 달성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 결과는 흔히 신문의 사회면에 소개되는 추문들이다. 두 번째로 우리의 판단을 장애하는 것은 ‘분노’다. 분노는 분개와 다르다. 분개는 정당하지 못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감의 발로이지만 분노는 시기 질투의 소산이다. 분노로서는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고 세상도 자신도 바로 잡지 못한다. 분노를 표현할 때 “앞뒤 가리지 않고”라는 말을 쓴다. 사태의 전후 맥락을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분노의 결과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는 그의 유명한 ‘평온의 기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내가 원치 않는 사태에 분노하지 않고 평온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사태를 개선할 수 있는 지혜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의 바른 판단을 장애하는 세 번째의 것은 바로 ‘앎’이다. 몰라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섣부르게 아는 것이 바른 판단의 장애가 된다. 욕망과 분노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섣부른 앎은 우리의 ‘귀’를 닫게 한다. 내가 해 봐서 ‘알고’ 내가 읽어서 아는 알량한 ‘지식’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못하게 장애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한 개인이나 한 조직이 잘못된 판단을 하는 대부분은 다른 의견을 듣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했거나 읽고 배운 것 외에 다른 것은 알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다른 경험과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예화다. 장님들은 자신이 만진 것만을 코끼리라고 생각한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주장하고 배를 만진 또 다른 장님은 ‘코끼리는 벽과 같다’고 주장한다.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결코 온전한 코끼리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 요컨대 ‘입’이 아니라 ‘귀’를 열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직면하는 문제들도 마찬가지다.모두가 ‘입’만 열고 ‘귀’를 열지 않는다면 여러 의견은 그냥 소음일 뿐 사태 해결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귀를 열어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한다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지혜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 최근 ‘공경문화 운동’을 새마을운동의 주요 방향으로 정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생각할 때 참으로 중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권리 주장만으로는 공동체를 만들 수 없고 상호 공경하는 문화를 통해서만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공경은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귀’를 통해서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