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질병의 원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무엇이 ‘있어서’ 병이 생기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이 ‘없어서’ 생기는 경우다. 전자로 말하자면 살아온 이력과 같은 것이다. 젊은 시절 무절제한 식습관, 과음 그리고 흡연과 같은 것들이 어김없이 지금의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자는 있어야 할 것이 부족하거나 결핍한 데서 오는 병이다. 건강을 회복하려면 과거로부터 오는 나쁜 영향을 없애는 것과 함께 결핍한 것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경우 결핍을 채움으로써 기존의 나쁜 것들은 치유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비타민 치료가 한 예일 것이다. 한 사회의 병리 현상도 마찬가지다. 조국사태 이후 우리 사회가 앓는 ‘몸살’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과거로부터 원인을 찾아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리고 있다. 멀리는 일제 유산과 분단과 전쟁의 문제에서, 가까이는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의 탄핵 등에서 지금 앓는 ‘몸살’의 직간접적인 원인을 찾고 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란 점에서 의미가 없진 않겠으나, 문제에 대한 충분한 해결을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비극의 재발을 위해 과거에서 원인을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이 결핍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어쩌면 결핍을 채우는 것이 과거로부터의 상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부족한 비타민을 채워주는 것이 누적되어온 여러 질병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조국사태와 관련하여 지금 우리 사회에 부족하거나 결핍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민주주의’이다. 87년 이후 우리는 스스로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독재자로부터 권력을 되찾았고, 우리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해 왔다. 그러나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만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쟁취하였던 것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였을 뿐이다. 한 단계 질적으로 높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요컨대 민주주의가 제도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영역에까지 두루 미칠 때 비로소 우리는 민주화에 성공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1987년 이후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데에만 집중됐다. 소위 ‘누가’ 대권을 쥘 것인가가 곧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대부분 51대 49의 구도하에서 승자는 독식하였고 패자는 다음 선거만을 기다리며 정권에 딴죽 걸고 어깃장 부리는 가운데 국민은 두 패로 나누어 반목하기 일쑤였다. 다수결에 따라 권력을 선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한 수단일 뿐 전부는 아니다. 그럴진대 승자독식을 당연시하거나 진영에 따른 패거리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태들이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정치란 ‘권력을 위한 쟁투’가 아니라 ‘공존과 상생’을 위한 대화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제도적 장치인, 의회나 국무회의 등이 모두 일종의 회의체를 의미하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다.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자신의 의견을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민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모색하고 선택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국회의원을 뽑을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세우면 어떨까? 첫째 여야를 막론하고 어느 한 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뽑지 않는다. 둘째 자신의 생각을 쉽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사람을 뽑는다. 지금 정치권에서 아전인수식으로 외쳐대는 여야의 대소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회의’를 잘할 수 있는 의원들이 많아질 때 우리의 삶이 좀 더 평화롭고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