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집안엔 의사가 없다. 그의 집안도 그랬다. 그런데 그는 의사가 됐다. 그것도 암 수술을 밥 먹듯 하는 외과의. 국내 최고 대장암 명의(名醫)로 꼽히는 김남
규(60) 세브란스병원 외과부장 겸 연세대 의대 외과학 주임교수 얘기다. 의대 졸업성적 최상위권. 어떤 진료과목도 지원할 수 있었던 김 교수가 육체적·정신적으로 고달프기로 유명한 외과를 선택한 까닭은 단 한 가지. 환자의 몸
에 직접 손을 대서 질병을 치료하는 매력을 떨칠 수 없어서다.얼마 전 그와
9년 만에 해후했다. MBC 메디컬 드라마 ‘하얀 거탑’이 인기 절정이던 2007년 2월, 세브란스병원 중앙수술실에서 대장암 수술 현장을 르포 취재하던 기자와 당시 집도의로서의 만남 이후 처음. 재회하게 된 건 매일같이 생명의 회복과 소멸을 접해야 하는 유다른 그의 삶과 철학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장암 발병률이 세계 1위라는 점도 한몫했다. 연간 4백50여 건의 대장암(결장암+직장암) 수술. 월·목요일은 온종일 수술하고, 화·수·금요일에도 오전 혹은 오후 반나절 외래진료를 하고 나머지 시간엔 수술하는 빽빽한 일과. 김 교수가 본격적으로 집도한 1993년 이후 올해 5월 말까지 23년간 수술한 대장암 환자는 무려 9천5백여 명에 달한다. 대장암외 항문질환, 염증성 장질환, 외상 등까지 합친 총 수술 건수는 1만2천여 건. 직장암 로봇 수술도 3백60여 건으로 국내 최다 기록이다. 전공의를 시작한 1
982년부터 30여 년 경력 중 대부분의 나날을 수술실에서 보내지 않고선 불가능한 횟수다. 수술 능력 또한 정교해서 그가 수술한 환자들의 평균 5년 생존율은 결장암이 88.4%, 직장암은 84.5%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래선지, 그는 최근 주요 외과질환의 우리 시대 명의를 엄선한 EBS 1 특집 프로그램 ‘명의-전설의 외과의 10’에서 대장암 분야 대한민국 최고 의사로 이름을 올렸다.지면 사정상 일일이 밝히긴 어렵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의술(醫術)을 지녀도 의사의 인성이 나쁘면 환자에게 진정한 치유의 힘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게 김 교수의 진료 철학. 겸손을 겸비한 인술(仁術)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는 수술에 임할 땐 의식 없이 누워 의료진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 환자를 생각해서라도 항상 ‘올인(다 걸기)’한다고 했다. 군데군데 헤지고 구멍까지 난 수술용 신발은 하루 평균 8시간씩 수술실에서 서서 보낸 그의 체중과 번민을 고스란히 지탱해준 징표에 불과하였다.올여름, 참 덥다. 그냥 ‘덥다’기엔 부족할 만큼 모질게 덥다. 그 더웠던 1994년 여름도 선풍기 한 대 없이 자취생활을 거뜬히 견딘 ‘대프리카(대구)’ 출신인 필자마저 나이 탓인지, 의지 탓인지 이번 여름엔 심신이 찌든다.하지만,
그런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 또 다른 ‘김 교수’들이 적잖다. 하루 4~5시간 자면서도 수술과 진료·교육의 연속을 감내하는 김 교수 못잖게, 무더위에 지쳐 늘어진 우리 살갗에 종종 감동의 소름을 돋게 하는 이들이다. 건당 8백원의 수수료 수입을 얻으려고 하루 내내 가가호호 방문해야 하는 택배기사, 뙤약볕 아래서도 담당구역 내 우편물 배달에 한창인 집배원, 그들을 위해 얼린 생수 나눔에 나선 주민…. 단순한 ‘밥벌이’를 넘어 직업인으로서 사명감에 투철한 이들, 그에 공감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인간에 대한 예의’로 화답하는 이들을 어찌 서민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청와대 호화 오찬’의 주역들에 비할 수 있을까.문득, 김 교수가 수많은 대장암 환자를 치료하며 환자들과의 소중한 인연 속에서 느낀 소회와 그것을 자양분 삼아 더욱 성숙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 펴낸 에세이집 제목이 떠오른다.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이지북). 기나긴 폭염이 준 교훈이 있다면, 그건 감사하는 마음이다. 묵묵히 폭염을 견뎌낸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그리고 그 폭염 속에서 대한 이들에게 덧붙일 한 마디,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