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고립이란 살아가면서 친구, 동료 또는 사회적 집단의 어떤 사람들과 함께 전혀 또는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매우 사회적이고 의존적인 동물인 만큼 최소한의 관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은 행복의 필수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고립’은 삶의 안위를 위협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OECD의 조사와 별도로, ‘가족이나 친척 접촉 빈도’라는 조사가 이뤄진 바 있는데 거기에서도 한국인이 혈연과 교류하는 정도가 세계 평균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왔다.사회적인 관계가 허약해지는 상황은 죽음과 관련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겪는 곤경은 신체적인 괴로움에만 있지 않다. 인간은 늙고 죽어가는 시간에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 역사 속에서 대부분 사람에게 그것은 별문제가 없이 이뤄졌다. 아무리 신분이 낮고 가난하더라도, 생애의 끝자락을 가족과 마을에서 주어지는 일정한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최소한의 사회적 욕구조차 충족시키기 어려운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연(無緣) 사회’로 정의되는 현상들이 나타났고, 그 연장 선상에서 ‘고독사’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고독사가 왜 문제인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존엄사’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존엄사는 무의미하고 원치 않는 연명 치료를 받지 않을 권리라는 차원에서 주로 논의되지만, 근본적으로는 ‘품위’ 있게 죽는 것을 의미한다. ‘품위’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이지만, 품위가 없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예를 들어,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쇠약한 상태에서 누군가로부터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면 비참한 지경이 아닐 수 없다. 죽어갈 때 곁에 아무도 없다면 그 역시 원치 않는 임종이리라. 우리는 왜 고독사를 원치 않는가. 우선 삶의 최종적인 단계를 외롭게 걸어가 그 종지부를 혼자서 찍어야 하는 허전함과 막막함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죽고 나서 오랫동안 주검이 방치되어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임사체험(의학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고 나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체험으로 ‘근사체험’이라고도 한다)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목숨이 끊어지자마자 유체 이탈(幽體 離脫 :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이 되면서 죽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이들이 있다. 고독사를 하고 나서 그것이 가능하다면, 여러 날 동안 혼자서 부패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유체이탈이 실제로 이뤄지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참혹하게 변질되는 자신의 몸을 직접 볼 수 없다 해도,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인간은 충분히 고통받는다.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죽음 이후에도 보장받고 싶어 하기에, 자신의 시신이 어떻게 다뤄지는지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고독사가 늘어나는 사회에서 타인들의 품위 없는 죽음은 곧 자신의 존엄을 위협하는 암시로 읽힌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최근 일본에서는 ‘묘우(墓友)’라는 새로운 인연이 생겨나고 있다. 홀로 죽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끼리 미리 네트워크를 맺어 교분을 나누고, 죽고 난 후에는 하나의 묘에 함께 들어가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생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는 스스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간의 격(格)을 얼마만큼 고결하게 세워왔던 가와 직결된다. 우리는 압축 성장으로 질주하는 동안 인격과 마음의 문제를 내팽개쳐 왔다. 고독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대안적인 공동체와 정책을 모색하는 것은 삶 그 자체를 깊이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작업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