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8일(日) 오후 3시, 흐림. 1층 아파트 베란다 창 너머로 좁다랗게 올려다보이는 하늘빛이 어정쩡한 푸름이다. 샛노란 은행잎들이 건너편 다세대주택 앞길을 ‘비보이 배틀’ 하듯 뒹굴던 나날도 금세 잊힌 계절로 스러지고, 싸한 대기만이 골목에 가득하다. 시나브로 병신년(丙申年)이 저문다.다사다난(多事多難). 필자 개인적으로도 그랬지만, 올 한해 유난히 이 네 음절에 고개 주억거릴 이들 많을 것이다. 아무리 기쁨[喜]과 노여움[怒], 근심[憂], 생각[思], 슬픔[悲], 놀람[驚], 두려움[恐]이 인간이면 누구나 지닌 칠 정(七情)이라지만, 일 년 내내 롤러코스터 탄 듯 국민 사이에 ‘반복 재생’돼온 해도 드물기에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로 말미암은 탄핵정국으로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 요동친다. 정부정책은 동력을 잃었다. 국격(國格)도 가없이 추락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지만, 분노 서린 ‘촛불 민심’은 청와대와 국회를 넘어 헌법재판소로까지 향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적폐를 없애자는 개헌론도 제기되고, 조만간 급작스러운 제19대 대통령선거 국면도 펼쳐질 전망이다.그뿐인가. 미래 먹을거리를 찾지 못하고 버둥대는 국가 경제, 부채만 한가득인 서민 가계는 침체일로를 걷는다. 극에 달한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또 어떤가. 북핵 문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현안의 해결도 시급하기 그지없다. 나라의 앞날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다. 이게 대한민국의 민 낯이다.대혼란을 예견했음일까. 2001년부터 해마다 이맘때쯤 대학교수 대상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발표해온 ‘교수신문’은 2015년의 그것으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선정한 바 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뜻.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탓에 나라 전체의 법과 도의가 무너져버린 상태’라는 속내를 담았다. 2016년을 대변하는 사자성어로도 손색없다.일반 국민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취업포털 ‘사람인’이 구직자를 대상으로 ‘올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조사했다. ‘아무리 구해도 얻지 못한다’는 ‘구지부득(求之不得)’을 필두로, ‘밤낮으로 잊을 수 없는 근심이 있다’는 ‘숙석지우(宿昔之憂)’, ‘몹시 마음을 졸인다’는 뜻을 지닌 ‘노심초사(勞心焦思)’가 뒤를 이었다.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지친 마음이 드러난 결과다. 직장인은 ‘구복지루(口腹之累)’를 으뜸으로 꼽았다. ‘먹고살 걱정’, 왜 안 그렇겠는가.사정이 이러니 누구든 ‘소통’과 ‘공감’을 이야기한다. 며칠 전 만난 한 장관은 “진정한 소통은 일이 되게 하는 것”이라 했다. 이틀 뒤 만난 한 대선주자는 자신의 혀가 “독하고도 바른 혀”라 했다. 전자는 역대 최악의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를 현명히 극복해야 할 수장(首長)이고, 후자는 ‘촛불 민심’으로 지지율이 급상승한 야권 인사다. 필자는 부디 그들의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길 바란다. 또한, 그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대한민국을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으로까지 이끈 주역이 국민이란 사실을.오후 7시. 밖엔 어둠이 제 세상인 양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내일의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곧 정유년(丁酉年) 새해도 밝아올 것이다. 누군가에겐 기뻤거나 슬펐던, 다른 누군가에겐 의미 있고도 없었던, 또 다른 누군가에겐 잊고 싶거나 결코 잊지 못할 나날인 한해였을 터. 묵은해의 아쉬운 일상을 차분히 마무리하자. ‘더할 나위 없는(?)’ 나날을 떠나보내는 우리를 위해 건배! 새해 벽두를 향한 설렘과 희망. 그래, 모든 해는 잇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