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뉴델리 NIIT 공대 컴퓨터 과학자들이 <벽에 뚫은 구멍>이라는 이색적인 실험을 했다. 어느 빈민가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 구멍을 뚫고 터치스크린 컴퓨터를 설치해놓았다.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컴퓨터는커녕 신문을 본 적도 없고 학교 문턱에 가본 적도 없는 문맹 상태였다. 더구나 컴퓨터 조작에 필요한 영어를 접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3개월 뒤에 가보니 아이들은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고 한다. 장난감처럼 갖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사용 방법을 깨우친 것이다. 무척 놀라운 이야기로 들리지만, 아이들의 학습은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 스마트폰 같은 기기를 던져주면 혼자서 만지작거리면서 시스템을 금방 깨우친다. 도구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말을 배우는가. 체계적인 문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냥 깨우쳐간다. 어떻게 가능할까.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정보나 지식을 두뇌 안에 입력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참여하고 스며들면서 존재를 형성해간다. 신체가 성장하듯이 언어가 삶의 일부로 조직화된다. 사리를 터득하고 문화를 내면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앎이란 타자와 상호작용하면서 자아를 창조해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한국이 압축 성장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로 교육열이 반드시 언급되는데, 대량 생산 방식의 인재 육성과 치열한 경쟁의식이 그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결과 전국민의 평균적인 지적 능력을 일정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 역효과가 점점 부각되기 시작했다. 가장 자주 지적되어 온 것이 인성의 황폐화인데, 반대급부로 국가 경쟁력이 높아진 측면이 있어서 그다지 절박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경쟁력 제고에도 그런 교육 체제가 걸림돌이 되는 것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의 어느 의과대학에서는 획기적인 시도를 한다. 학생들을 미술관에 보내서 그림과 조각을 감상하도록 하는데, 과중한 학업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정서를 순화하기 위한 가외적인 활동이 아니다. 관찰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예술 작품을 요목 조목 들여다보면서 의미를 찾아내는 안목이 높으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가 놓여 있는 여건 등을 섬세하게 고려해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눈과 환자를 보는 눈이 상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가르쳐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스스로 깨우쳐 가야 하는 감수성이다. 지식이 일부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에는 가르침이 절실했다. 그러나 정보와 지식이 2년마다 두 배로 폭증하고 그 접근 가능성이 엄청나게 넓어지는 지금, 그 무한한 자료들 가운데 필요한 것을 선별하고 조합하여 자기 나름의 지성을 쌓아가는 역량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 재능은 맥락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안목과 과제의 본질을 파악해내는 직관을 내포한다. 그것은 머리속에 지식을 잔뜩 집어넣는 데서 생겨나지 않는다.상황에 부딪쳐서 씨름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면서 터득해가야 한다. 얄팍한 지능이 아니라 깊은 지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그러한 지성은 다양한 장(場)에서 존재를 연습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줘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지 않아도 받는 사람이 있다. 가르쳐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배움의 능력이 있다.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씨앗에 물을 주지 않았을 뿐이다. 시인 예이츠는 말했다. ‘교육은 양동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밝히는 것이다’ 그 불이 켜지면 경이로운 일이 일어난다.내면의 탁월한 잠재력을 두드리는 놀이가 시작된다. 배움은 생명의 리듬과 역동을 따라가면서 공동의 세계를 디자인하는 유쾌한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