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국난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시는 선조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세계 경제 10위권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예부터 수많은 외세침입, 36년간 일본 식민지배, 6·25전쟁 등 가난을 극복하기엔 너무나도 혹독했다. 불과 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봄철이면 끼니를 해결할 식량이 없어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보릿고개를 넘었다.이렇듯 어렵게 살아온 대한민국은 세계 제2차대전(1939.9.1~1945.9.2) 이후 147개국에 달하는 신생국가 중에서 GNP 기준 146위의 최빈국이었다.이런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1964년 서독광부와 간호사를 담보한 자금 그리고 1965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빌린 대일 청구권 자금, 같은 시기 8년간에 걸친 월남파병 용사들의 전투수당 일부가 국가발전의 종자돈이 되었고, 1970년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이 추진되면서 ‘하면 된다.’라는 신념과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으로 국민의식 개혁을 이루면서 농촌근대화를 시작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개발도상국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우리나라를 직접 방문하여 새마을운동을 전수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한 UN에서는 개발도상국 원조 핵심사업(ODA)으로 새마을운동을 채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 관련 기록물(22,084건)은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에 대하여 한국정부와 OECD가 공동으로 연구하는 등,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끄는 것이 새마을운동의 현주소이다.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의 성공은 새마을연수원장과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을 역임한 김준원장의 영향이 크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지도이념을 받들어 새마을지도자는 물론 공무원, 기업인, 교육계, 법조계, 국회의원과 장차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을 새마을역군으로 교화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농촌의 남녀지도자와 각계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한솥밥 먹고 숙식을 같이하며, 손뼉 치고 노래하며, 새마을 성공사례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함으로써 국민총화가 이루어지고,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원동력을 조성하였다. 당시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은 인간 용광로라는 별칭이 있었는데 이 용광로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하면 된다! 는 신념에 찬 새마을 형 애국자, 위대한 새 역사 창조의 새마을지도자를 양산하는 거룩한 산실이었다.김준원장은 1926년 4월 25일 전남 영광군 군남면 포천리에서 출생하여 이리 농림학교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도 역임한 농학전문가이다.새마을운동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김준원장의 농심 철학이다. 이농심행 무불성사(以農心行 無不成事)’ 즉 농심으로 행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다는 것이 지론이다. 새마을연수원에서 김준원장은 농심 이론으로 사회지도층의 애국애족, 경리중의(輕利重義,) 청렴정직, 근검절약, 호애공생(互愛共生) 등 충의심의 고취와 정신계몽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