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서 분노한 얼굴들이 이어진다. 세상 사는 것이 각박해지다 보니 서로 화내며 얼굴 붉히는 일들이 늘어난다. 그런가 하면 정치적인 이유로 정파 혹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분노한 표정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세상에서, 아니 내 주변에서 나를 화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더구나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 내 눈앞에 있다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해야만 할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보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노는 인간에게 양날의 칼이다. 분노는 적절하게 내 것으로 하면 약이 되지만,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면 독이 된다. 아예 분노를 악으로 규정하고 제거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로마시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였다. 몽테뉴 또한 분노에 의해 조종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려했다. “다른 무기들은 우리가 그 무기를 움직이지만, 분노라고 하는 무기는 반대로 우리를 움직인다. 분노라는 무기가 우리를 잡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 무기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격정적 분노에 대한 우려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분노나 증오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할 때 자신의 심성이 파괴되는 것 같은 우울감을 느끼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우리는 살아가면서 미움과 증오, 시기와 질투 같은 감정을 수없이 갖게 된다. 물론 그러한 감정들은 타인의 지나친 행동으로 인해 내 마음이 상처를 받아 생겨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잦아지면 나 자신을 갉아먹게 되는 나쁜 정서들이다.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갖고 사는 삶이 평온하고 행복하기는 어렵다. 화를 내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때는 그렇게 해야겠지만, 나쁜 감정에만 갇혀 자신을 얽어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부부 사이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서로 믿음을 이어가면 소중한 사랑을 키워갈 수 있는 것이 부부이지만, 반대로 서로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주고받게 되면 미움의 관계로 전락해 버리기도 한다. 절망하고 포기하기 이전에, 상대를 이해하고 넓게 품을 수 있는 나의 노력은 불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사랑이 메마른 시대라 해도, 가족은 순수한 사랑을 지키는 우리들의 마지막 보루이다. 가족들만큼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서로 안아줄 때 우리들의 살아가는 힘이 고갈되지 않고 계속 나올 수 있다. 일의 관계로 맺어진 직장이나 조직 같은 곳에서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위계질서에서 위에 있는 상급자일수록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처지나 상황을 이해하며 대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절실한 미덕이다.분노의 힘이 언제나 센 것은 아니다. 분노를 통해 타인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면 그 사람을 일시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마음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분노의 마음만으로는 세상의 더 나은 변화를 완결시킬 수가 없다. 그 바탕에 인본주의,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세상은 비로소 지속 가능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세상에, 그리고 나의 마음에 필요한 것이 사랑의 정신이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톨스토이가 묻고 답했던 말이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다. 모든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며 걱정한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은 믿음을 전제한다. 그 믿음은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2020년 새해는 사랑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