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카뮈의 <오해>라는 희곡이있다. 그는 1935년 <뉴욕 타임즈>에 실린 어느 기사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이방인>에도 주인공이 어느 신문에서 읽는 기사의 내용으로도 소개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여관을 운영하는 모녀가 있었다. 원래 그 집에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릴 때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그 모녀는 여관을 운영하면서도 너무 가난했던 나머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손님 가운데 돈이 좀 있어 보이면 살해하고서 돈을 훔치고 시체는 강물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듬직한 청년 한 명이 여관을 찾아왔다. 사실 그는 객지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정체를 숨겼고 모녀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모녀는 그 대신 그가 돈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다. 늘 그렇게 하듯이 그 청년을 죽여서 강물에 던졌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돈을 빼려고 지갑을 꺼냈는데, 거기에 꽂혀 있는 신분증을 보고 경악했다. 결국 모녀는 자살하고 만다.인간은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탐욕에 눈이 멀면 생명의 한계도 무시한다. 방송작가 고희영 씨가 쓴 [물숨]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해녀들은 물속에서 오랜 시간 머무는데, 저마다 자신의 숨의 한계를 알고 있다. 그것을 초과하지 않도록 적절한 깊이에서 일을 멈추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온다. 그런데 하필 그 시점에서 탐스러운 전복 등이 눈에 띄면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 더 물질을 하기도 한다. 그때 그 한계를 지난 호흡을 물숨이라고 한다. 이미 과호흡 상태인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 숨이 남아있다고 착각하고 머물다가 올라오면서 산소가 부족해져 실신하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돈의 힘이 점점 막강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당장 눈앞에 어른거리는 이익에 눈이 멀어 삶을 그르치기 쉽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 금욕하고 수련만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삶의 지향을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해야 한다. 기업들 가운데서도 단순한 영리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비전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지구촌의 빈곤 극복에 공헌하는 것으로 주목을 받는 탐스 슈즈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창업자 블레이크 마이코스키는 ‘ONE FOR ONE'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기발한 기부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소비자가 그 기업의 신발을 하나 구입하면,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신발을 신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한 켤레가 전달되는 방식이다. 장사꾼이 물건을 팔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거림에도, 그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의 힘을 믿고 그 가치를 현실로 만들어냈다.고객들이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 안에 잠재된 선한 본성을 일깨운 것이다. 돈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세상이지만, 사람에게는 자기를 넘어서는 더 원대한 의미를 공유하고 실현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코드가 여전히 살아 있다.우리는 아집으로 늘 부대낀다. 세상이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긴다. 그런데 그것은 괴로움만 자아낼 뿐이다. 그럴 때마다 자문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매우 막연한 질문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 답을 명료하게 얻을 방법이 있다. 죽기 전에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진정한 나의 삶을 살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내가 죽고 난 후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해 주기를 나는 바라는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종지부 앞에서 우리는 존재의 근원을 되묻게 된다. 자아의 경계를 넘어 원대하게 연결되는 마음, 소박한 일상의 경험 속에서 확인되는 생명의 충만함이 오늘의 나를 살아있게 한다. 그 기운에서 비롯되는 행위는 아름다움으로 꽃처럼 피어나 모두에게 은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