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해설가 고(故) 하일성 씨의 경험담이다. 1980년대 중반 무렵 일본에서 개최된 한일 청소년 야구대회를 중계하고 있었다. 경기의 중반부쯤에 이르렀을 때, 한국의 방송국에서 긴급한 연락이 왔다.
중계진이 한국팀과 일본팀을 뒤바꿔서 설명하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확인해보니 정말이었다. 아나운서와 해설가 둘 다 혼돈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소년팀이다 보니 얼굴을 알 수가 없고, 유니폼에도 색깔과 등번호만 들어가지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팀 자체를 거꾸로 인지하다니 프로 방송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일성 씨도 그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최대의 실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황당한 사건이지만 그 정도 착각은 한 바탕 웃고 넘어갈 수 있는 해프닝일 뿐이다. 정말로 심각한 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일들이다. 몇 가지 예를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집에서 약을 복용하면서 혼돈하여 엉뚱한 약을 먹거나, 음식을 조리하면서 위험한 물질을 잘못 섞어 중대한 사고가 발생한다. 병원에서 의료진의 실수로 주사나 약물을 잘못 처방해서 환자가 목숨을 잃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한국에서만 하루에 10명 정도 사망자가 발생하는 교통사고도 거의 다 부주의와 태만에서 비롯된다. 비행기를 이륙시킬 때 확인해야 하는 사항이 수십 가지에 이르는데, 베테랑 기장조차 깜빡 중요한 것을 놓쳐서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지각(知覺) 시스템은 워낙 불완전해서 착각이 종종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명의 발전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오류가 빈발하는 듯하다. 신호와 자극의 과잉 탓이다. 우리가 온종일 손에서 떼지 않는 스마트폰은 1967년 미국의 나사가 아폴로호를 달에 보낼 때 사용하던 슈퍼컴퓨터에 비해 무려 10만 배나 성능이 뛰어나다. 이런 환경에서 인류의 삶은 윤택해졌는가. 매일 수십 통 또는 수백 통의 문자를 교환하고, 수시로 뉴스와 유튜브를 검색하는 습관이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가.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기기는 비약적으로 ‘똑똑(스마트)’해지는데, 인간은 오히려 바보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자주 받게 된다. 나를 돌아보자면, 예전에 비해 사소한 실수를 많이 하고, 물건들을 자주 분실한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새로 설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는 듯하다. 왜 그럴까. 생활이 급속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근로자들의 주의가 산만해질 때 지적 능력이 10살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마리화나를 피울 때보다 더 단순해진다고 한다.지식 정보사회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것을 얼마만큼 확보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개인적인 생산성이 결정된다. 평온한 가운데 상상력과 창의성은 꽃을 피운다. 그러한 마음의 에너지 없이는 과학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조앤 에릭슨은 <감각의 매혹>이라는 책에서 ‘창발성 없는 과학은 단순한 테크닉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오감으로 세계와 드넓게 교섭하고 자신의 느낌을 청아하게 주시할 수 있을 때 사물에 대한 이해도 명징해질 수 있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승조靜勝躁…청정위천하정淸靜爲天下正’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사람에게는 고요함 속에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매일 일정한 만큼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평온함에서 마음의 질서를 세우고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집중력은 고요함 속에서 자라난다. 미디어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심심함을 견디는 마음의 힘이다. 외적인 자극이나 사물에 의존하지 않고 시간의 여백을 채울 수 있는 내면의 풍부한 율동이다. “위대한 일은 조용하고 단조로운 생활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버트란드 러셀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