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일이다. 역사의 어느 페이지를 열어보아도 개인들 사이의 작은 다툼에서 국가들 사이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도 대립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것은 대개 고통을 가져오지만 때로 그것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한 단계 향상되기도 한다. 그 여부는 갈등에 어떻게 대응하고 넘어가느냐에 달렸다. 오랜만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긴장이 감돌고 있다. 반일 감정이 달아오르고 불매 운동이 번져나가는 지금의 국면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조짐이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를 통합해온 이념은 민족주의인데 거기에는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하게 깔렸었다. 우리는 일본의 상품이나 음식이나 대중문화를 좋아하고 관광지로도 엄청나게 선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반일의 정서가 잠재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일본의 무역 조치를 계기로 갑자기 점화된 것이다. 그러나 갈등의 해결에 감정은 얼마나도움이 될까. 많은 경우 그것은 맹목적인 열정으로 비화하면서 현실 인식을 방해한다. 지금의 사태는 아베 정권이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딴죽을 건 것이다.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강제노역 배상금 문제가 깔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한때 세계 최고를 달리던 일본의 전자 산업이 한국에 밀려난 것에 대한 자괴감, 남북미 관계가 풀리면서 아시아에서 위상이 줄어들 것 같은 위기감도 작용하는 듯하다. 이 난국을 풀어가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상호의존하는 상태로서, 과거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완전히 패자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는 프레임은 맞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냉정한 외교의 기술로 돌파해야지, 국민이 흥분하고 나설 일이 아니다. 화가 나면 지는 거다. 일본을 싸잡아서 비난하고 혐오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아베와 일본의 우익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나마 한국에 우호적이던 일본의 시민까지 자기들 편으로 자연스럽게 합류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매 운동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치밀한 계산과 전략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불매 운동이 과연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그로 인해서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은 없는지 등을 면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 일본 상품을 취급하면서 생계를 잇는 한국인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비분강개의 함성만 높이는 것으로는 지금의 복잡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모순은 매우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으로 존재한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분야의 세계 최고로 우뚝 서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건강과 목숨을 잃었다. 대기업들이 승승장구했지만, 그 이면에는 하청업체들의 눈물이 스며 있다. 우리는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항거하듯, 그런 부조리에 목소리를 제대로 높여본 적이 있는가. IMF 구제 금융 당시 국민이 금반지까지 내놓으면서 기업을 살렸는데, 이후에 위기를 극복하고 기업들이 튼튼해지면서 그 은혜를 제대로 갚았는지 따져보았는가.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일 감정만큼이나 무분별할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 그것을 떠받치는 경제의 안정이다. 바로 그 점에서 일본은 중요한 이웃이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미워하면서도 많은 것을 공유하는 관계에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속에서 서로 협력하면서 경제적인 풍요를 일궈온 것이다. 역사의 잘못을 명백하게 밝히고 부당한 것은 바로잡아 가되,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제 한국은 예전의 약소국이 아니다.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서는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할 수 없다. 성숙한 시민으로서 의연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일본을 이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