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오륙남’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마스크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50대 60대 남자라는 사실에 빗대어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기에 저런 행동을 하느냐”고 젊은이들이 나이 든 사람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이다.
이제 오륙남이란 말은 지하철 마스크 난동을 두고만 하는 말이 아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나이 든 사람들의 볼썽사나운 갖가지 사실을 두고도 ‘또 오륙남’이라 한다.
소위 기성세대라 일컫는 60대 이상의 한국 남자들이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자라난 환경’ 운운하는 젊은이들의 말투가 가소롭기도 하다. “너희는 상상도 못하는 엄혹한 세월을 보냈다” “니들이 이만큼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우리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다”라고 나무라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자라나던 그 세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돌이켜보면 한 인간이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데 바람직한 환경이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초중등학교 시절 수업료(세대에 따라서는 월사금, 육성회비, 기성회비라고도 했다)를 제때 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벌씌우거나 심지어 담임교사가 회초리로 때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소풍 때면, 김밥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학급마다 선생님용 김밥과 통닭을 거두어 선생님들을 위한 식탁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직급에 따른 위계, 나이에 따른 서열, 성별에 따른 차별, 애국애족의 핑계로 정당화되었던 공권력의 횡포와 폭력이 만연하던 시절에 자라난 세대가 바로 우리다.
아들뻘 손주뻘 되는 젊은이들이 우리 세대를 가리켜 ‘오륙남’이라 부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왜 그들이 그렇게 보고 있는지는 성찰해봐야 한다. 우리가 자라면서 겪었던 갖가지 형태의 차별, 위계, 폭력을 우리 스스로 내면화하고 ‘그때 그 시절’이라면서 추억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해온 미투, 갑질 등의 문제도 사람 사는 사회는 ‘원래 그런 거’라는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고 살아온 결과는 아닐까.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제도를 쟁취한 것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착각해 온 것은 아닐까. 진정한 민주화는 정치와 선거와 같은 제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소위 ‘미시권력’--- 눈에 금방 뜨이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늘 작동하는 권력의 비민주적 행태를 민주화하고 일상에서 민주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다.
우리 세대가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남겨놓은 부채도 많다.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가? 숨 막힐 정도의 경쟁사회, 학벌과 부모찬스가 생존의 법칙인양 만들어 놓은 것은 우리 자신 외 누구의 책임일까?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과소비와 그에 따른 기후변화는 누구의 책임이며 그 재앙은 결국 누구에게 닥치게 될까?
기후와 환경문제를 보자면 사고는 우리가 치고 그 재앙은 오롯이 지금의 젊은 세대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가 겪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우리말에 ‘나잇값’이란 말이 있다. 그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나잇값을 한다면 그건 어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말하자면 ‘어른 값’을 해야 할 것이다.
어른 대접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을 찾아 솔선하는 것이 어른 값하는 일이며, 우리가 저질러온 저지레를 조금이나마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 어른 값하는 일일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충고나 조언 보다는 격려와 응원을 하는 일이 어른 값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물질에 시간이 더 해지면 아름다워진다. 신라의 불상이 고려의 자기가 아름다운 것은 세월이라는 시간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월이라는 시간이 더해지면서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