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포도잎으로 싼 쌀 음식인데, 한번 먹어볼래?”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같은 기숙사의 그리스 여학생이 음식을 건넸다. 소고기와 쌀을 포도잎으로 돌돌 말아 만든 돌마데스(포도잎말이)였다.
친한 사이였지만, 그 친구는 음식을 권하면서 수줍게 한 마디 덧붙였다. “다른 미국학생은 몰라도, 너는 이거 먹겠지. 깻잎으로 밥을 싸 먹으니까.” 기숙사는 예전에 수녀원으로 쓰던 건물이어서, 반지하에 공동 부엌이 있었다. 그리스 친구는 거기서 내가 오징어채도 먹고, ‘검은 종이 같은’ 김과 깻잎을 먹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 학생들은 오징어라면 시체 냄새가 난다고 해서 질색을 했지만, 친구는 개의치 않았다. 그 친구가 그리스 고유의 음식을 전하면서, 겸연쩍어 하며 깻잎을 언급한 것이다.
세계의 먹거리란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쌀, 밀, 보리, 옥수수, 감자 등 지역에서 경작하기 좋은 곡물류에 어촌, 산촌, 평야, 목초지, 유목지 등 환경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생선, 채소, 산나물, 고기류 등을 상하지 않게 보관한 후, 적절히 조리하여 섭취하는 게 먹거리다. 쌀을 깻잎으로 싸느냐, 포도잎으로 싸느냐 하는 것은 커다란 문화적 이유를 달 필요가 없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다. 한국에 포도나무가 많았고 깻잎이 없었다면, 우리도 포도잎말이 음식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깻잎과는 다르다고, 생소하다고 포도잎에 신기해 하고 큰 의미를 두곤 한다. 신토불이적 사고에 너무 익숙한 것 아닌가. 신토(身土)는 하나다? 맞다. 각 나라마다 토양에 맞는 음식재료와 조리법이 있고, 그에 따라 제각기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신토불이에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잠재해 있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 것만’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갖게 된다. 다양성의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글로벌 시대에는 글로벌한 먹성이 필수입니다”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활동한 재미한국인 정치가의 경험담이다. 다른 문화의 사람을 만나 그들의 풍습과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없다면, 우리는 세계의 다양한 흐름을 좇아갈 수 없다. 다름은 미숙함도, 틀림도 아니다.
한국인에겐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름과 차별의 이유를 알아보는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나라는 단일한 문화 전통을 오래 유지해 왔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하는데 서툴다.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조금만 다르면, 곧 차별적으로 대우한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한국 사회 안에는 혈연, 연고지, 학교, 직종, 거주지 차이, 빈부차 등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구분에 따른 차별이 심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차별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다.
다름을 인정하고, 남을 존중하는 일은 나의 독특함을 알고, 나를 진정으로 존중할 때 가능하다. 다름의 이유를 알 때 우리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나를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의 다른 면인 것이다. 다름은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기도 하니까. 나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좋음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새마을운동이 추구하는 공경의 가치도 궁극적으로는 다름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한다. 청년과 노인이 서로의 차이를 알고, 각각의 삶이 어떤 면이 좋은 지, 힘든 지, 무엇을 원하는 지를 함께 고민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공경이 형성된다. 서로를 인정할 때, 청년은 어르신에게 노인은 청년인 후배에게 진정으로 공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 다름을 존중할 때, 상대를 무시하고 차별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공격이 아니라 공경이 시작된다.
포도잎은 비타민을 비롯한 많은 영양소를 포함하고, 항암효과가 있고, 심혈관질환에 좋다고 한다. 포도잎도 알고 나면 가까이 해 둘 먹거리다.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는 옛 친구에게 말하련다. 너의 포도잎은 생소함, 다름이 아니라, 독특함이며, 건강식이며, 좋은 우정의 표식이었다고. 나의 깻잎은 부끄러움이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