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다면, 한국에 충무로가 있다.” 이번 2월, 아카데미 에서 <기생충>으로 각본상을 획득한 한진원 작가(봉준호와 공동수상)의 수상소감이다. 충무로가 아직 부족할지 몰라도 이야기 있는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다는 작가로서의 자부심을 밝힌 것이다. 기생충은 감독상, 작품상, 국제영화상도 수상했고, 미술, 편집 부문에서도 우수한 평가를 받았는데, 그 밑바탕은 탄탄한 이야기다.
영화제작에는 문외한인 필자의 눈으로 보아도, 이야기만 본다면 <기생충>은 올해의 경쟁작에 비해 탁월하다.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전쟁영화인 <1917>이나 할리우드의 뒷이야기를 다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실제 사건으로 익숙한 이야기라면, 기생충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흔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전개하여 단연 돋보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야기의 구성은 세계인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기생충>의 성공은 봉준호라는 탁월한 작가 겸 감독의 역량 없이는 힘들었겠지만, 다른 한편 2000년대 들어 꽃피기 시작한 한류 드라마, K-pop을 이은 한국적 종합예술작품의 성공이며, 한국적 스토리의 성공이기도 하다.
지난 백 년 동안, 조선 왕조의 몰락과 일제의 강점기, 전쟁과 정치적 탄압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우리나라는 문화적 전통과 역량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 왔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왕실에서 일어난 온갖 일들을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당대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숱한 드라마와 이야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일제의 철저한 압제 하에서도 우리의 역사를 찾아내고 지키며 한글을 현대화하여 문자를 지켰다. 전쟁의 참화와 분단의 비극 속에서도, 급격한 산업화와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한글로 적은 각 시대의 비범한, 또 평범한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대만, 홍콩 등도 우리와 유사하게 격변과 고난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우리에겐 그들에게서 찾기 힘든 뚜렷한 특성이 하나 있다. 가혹한 권력에 맞서 살아온 보통사람들의 견실한 삶과 질긴 힘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존중과 낙관적 태도도 있다. 이것이 동학혁명과 3·1운동을 가능케 한 힘이며, 민주화를 가능케 한 힘이다. 민주화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우리의 문화적 자산과 이야기를 콘텐츠로 삼아 드라마, 음악, 오페라, 영화를 만들었고, 이들 작품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게 되어 한류가 탄생했다. 중국, 홍콩, 일본의 대표 영화와 우리의 대표 영화(소위 천만 관객 영화)를 비교해 보면, 우리 이야기의 역동성과 긍정적인 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이야기의 힘은 고난의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풍부하다는 말은 우리가 그만큼 평탄하지 못한 삶을 꾸려왔다는 말이다. <기생충>이 조명한 지하와 반지하 주택은 서구인이나 일본인에게는 낯선 주거형태라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열악한 주거환경, 어두운 면을 말해준다. 천만 관객 영화인 <국제시장>은 분단의 역사와 독일에 파견된 광부, 간호사, 월남전 참전 등 격변의 시대와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피폐한 삶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어려운 현실에 적극적이고, 끈질기게 저항하며 긍정적으로 대응하여 왔다. 문화적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 이야기의 힘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의 삶과 문화적 역량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고, 과소평가 되어온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구 문화에만 몰두하거나, 아프리카 국가보다 가난했던 시절을 강조하는 일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특정한 짧은 시기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게 좋다. 서구 문화에 위축되지 말고 자신 있게 우리 삶과 우리 문화를 성찰하고, 이야기해도 좋다. 이제 우리는 한국적 삶의 굴곡과 건강함을 알고, 그 명암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보여주었듯이 우리 이야기는 세계적인 공감을 자아냈다. 정보통신 혁명으로 긴밀히 얽힌 이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세계 문화의 변방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서구 문화에 기생하지도 않는다. 좋은 계획이 있다면, 충무로의 이야기꾼은 세계의 이야기꾼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