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어느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일본의 지역 탐방 프로그램에 함께한 적이 있다. 참가자 대다수가 청소년이었는데, 삼일쯤 지났을 때 일본 쪽 실무자가 내게 와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한국의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다투었느냐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했더니, 그런데 왜 남녀가 늘 따로 다니느냐고 되물었다. 듣고 보니까 정말로 학생들은 성별로 배타적인 무리를 이뤄 행동하고 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이따금 거리나 전철에서 청소년들이 단체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같은 학급이나 동아리 소속임이 분명한데, 남녀가 거의 섞이지 않는다. 남녀유별은 성별 고정관념과 맞물려 이른 나이에 시작되는 듯하다. 여아에게 분홍색 가방과 공주인형을, 남아에게 파란색 가방과 장난감 총을 권하는 관행은 여전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남자 아이 부모들끼리, 여자 아이 부모들끼리 카톡방을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는 때도 많다. 자녀의 방과 후 활동이나 사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것인데, 어릴 때부터 친구 관계가 제한되고 놀이나 취향도 이분화된다. 축구나 농구를 하고 싶은 여학생이 남학생들 틈에 끼어서 운동하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연예인에게 관심이 있는 남학생이 여학생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면 놀림감이 될 수도 있다. 단지 연애하는 사이일 경우에만 인정받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성별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아이들이 학급의 문화를 주도하면 나머지 아이들도 영향을 받는다. (정말로 성격이 개방적이어서 이성과 쉽게 어울리기도 있고, 일종의 과시적인 동기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학급에서는 동성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자칫 구설에 오르는 것이 두려워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분위기다. 젠더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나의 청소년기를 되돌아보면 교회의 학생회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여학생들을 동료로 발견할 수 있었다. 수련회나 예술제 등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활동 속에서 남녀의 간격이 별로 의식되지 않았다.과제에 몰입하면서 스스럼없이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예술은 훌륭한 매개물인데, 지금도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뮤지컬이나 합창을 함께 꾸리도록 하면 남녀학생들이 편안하게 어우러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 교사에게서 듣는다. 체육 수업도 중요하다. 승패를 가르는 경기나 상대방을 격렬하게 공격해야 하는 피구 같은 게임에서는 대다수 여자 아이들과 일부 남자 아이들이 수동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쉽다. 그에 비해 공동체 놀이는 다른 장면을 빚어낸다. 경기도의 어느 중학교에서는 체육 시간에 혼성으로 팀을 짜서 대나무 춤을 추도록 했는데, 학생들이 방과 후까지 남아 자발적으로 연습하더란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하는 재미에 빠져들면 성별 구분은 잊히기 마련이다. 그 점에서 학교 안이나 지역사회에서 어떤 문제를 함께 해결해가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도 비슷한 효과를 드러낼 것이다. 융합이 시대의 키워드로 떠오르는 가운데, 여러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많은 청소년이 성별 사회화의 경직된 틀에 갇혀 있다. 이성을 오로지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남녀가 부질없는 혐오와 적대 감정으로 치닫는 풍조도 거기에 맞물려 있다. 젠더만이 아니다. 나이, 계층, 학업 능력 등에 따라서 교우관계가 제한된다. 그런 삶은 온전한 성장을 가로막고, 사회적인 분절을 일으킨다. 외형적인 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본연의 자아로 서로 만날 수 있을 때, 아이들의 개성과 역량은 다양하게 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