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스턴케이프에서는 조촐한 매장식이 열렸다. 고인은 사라 바트먼이라는 여성이었는데, 그는 1815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던 분이다. 2백여 년이 지나서 고향 땅에 다시 묻히게 된 것은 무슨 사연이었을까. 19세기에 아프리카의 지역 대부분이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도 백인들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사라 바트먼은 매우 특이한 신체를 지니고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슴과 엉덩이가 매우 커서 백인 남성들의 호기심을 끌었고, 어느 영국인이 그를 구입해서 유럽으로 데려갔다.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 후에 바트먼은 프랑스 등 여러 지역에 끌려다니면서 동물처럼 전시되었다. 광장, 대학, 서커스 등에서 나체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이후 인기가 사라지게 되자 성매매를 하면서 생계를 꾸리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27살에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녀는 죽은 후에 그 특이한 신체를 보존해야 한다는 이유로 박제되어 프랑스의 어느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가혹한 운명의 사슬을 풀어준 분은 만델라 대통령이었다. 그는 1994년부터 프랑스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해 바트먼의 유해를 본국으로 이장시킨 것이다.인간이 인간에게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또는 양상이 바뀌었을 뿐, 지금도 다른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자신과 다른 성향이나 외모를 지닌 사람들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다른 민족 출신을 차별하고 괴롭히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그런 차별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차이를 근거로 해서 이뤄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차이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상대방의 훌륭한 점보다는 모자란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짙다.못난 부분을 들춰서 비하하고 경멸하고 배척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런 반응의 뿌리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면 우는 갓난아이처럼, 낯선 사람을 보면 경계하기 일쑤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일단 방어막을 친다.2018년 예멘의 난민 5백여 명이 제주도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위험시하면서 난민 인정을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성범죄자 취급을 하면서 빨리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 3년이 지난 지금, 완전한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당시 난민 수용을 촉구하는 어느 단체가 제주도에서 이색적인 행사 하나를 열었다. 한국인과 예멘인이 일대일로 마주 앉아 상대방의 얼굴을 그려주는 이벤트였다. 참가자들은 교류가 진행되면서 국적의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음을 느꼈다. 난민과 자국민의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그 자체, 그 인생에 담겨 있는 경험에 마음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보자면, 같은 예멘인 안에도 그리고 같은 한국인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 다채로움에 주목할 때, 몇 가지 피상적인 특징으로 사람들을 묶어 획일화하지 않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맞아들일 수 있다. 나 자신 역시 외형적인 범주만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부질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자기 안에 깃든 여러 개성과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다. 그런 자유로운 인간들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창의적인 기운으로 생동할 것이다. 그 발랄한 기운을 회복할 때, 삶은 한결 다채롭고 흥미진진해지고, 인간이 빚어내는 다양한 문화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