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다음 소프트는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를 하나 내놓았다. 트위터와 블로그의 글 5만여 개에서 ‘인간관계’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들을 분석해본 것이다. 그 결과, 1위는 ‘무섭다’였다. 그다음으로 ‘허전하다’ ‘힘들다’ ‘스트레스’의 순서로 집계되었다. 우리 시대의 마음풍경을 반영하는 자료인가. 이런 상황에서 외톨이의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이에 시장은 발 빠르게 대응한다. 나 홀로 소비자가 늘어나는 ‘1코노미’에 발맞춰 다채로운 상품과 마케팅이 선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욕구는 소비로만 충족되지 않는다.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혼자서만 지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타인과 깊은 연결을 맺으려면 마음의 중심끼리 이어져야 하고, 정서적인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우선 자기의 중심이 든든하게 세워져 있어야 하고, 자기를 신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자신과의 고독한 대면이 요구된다. ‘고독’이라는 단어에는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두 글자에 각각 ‘립’(立)자를 붙여보자. ‘고립’과 ‘독립’이 된다.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등장한 개인은 <독립>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고 자기만의 인생을 누리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 <고립>에 이르고 만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한편으로 철저하게 혼자 있는 고독의 시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타인과 충만하게 교류하는 교류의 시간을 일정하게 확보해야 한다. 그 두 영역은 명확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모바일 통신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우리는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카톡이 울려대기 때문에 자기에게 오롯이 몰입하지 못한다. 모처럼 만난 연인들이 커피숍에서 각자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광경에서처럼, 정보의 반짝임을 쫓아다니느라 곁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으로 맞아들이지 못한다.
정현종 님의 ‘섬’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단절된 소통을 아쉬워하면서 타인에게 이르는 통로를 더듬다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섬을 발견한 것이다. 그 섬에 이르려면 나를 떠나야 한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폐쇄된 테두리를 벗어나 중립지대에서 만날 때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섬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아를 조망할 수 있다. 일인칭과 이인칭의 배타적인 긴장에서 풀려나 삼인칭의 시선으로 각자를 되돌아보는 여유가 생긴다. 말하자면 <나>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의 간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섬은 곧 미디어다. 너와 내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지만 공통의 무엇인가를 매개로 해서 소통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영역을 광대하게 개척해왔다. 아득한 고대의 신화에서 현대의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형형색색의 상징 세계를 구축해왔다. 상상력을 발휘해 창조하는 의미의 세계는 사람들이 각자의 내밀한 골방에서 나와서 함께 머물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광장이다. 감동적인 연주를 듣는 청중들은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그 순간 하나가 되어 전율하고 공명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고 자신의 위대한 가능성을 만나게 된다.
타자들을 끊임없이 대면하고 때로 더불어 일을 도모해야 하는 세상에서, 저마다 독자성을 견지하면서 공생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창조의 재료가 될 때, 이질성은 다양성으로 승화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고립되고 단절된 세계들을 잇는 가교(架橋)다. 서로 상대방 또는 다른 집단과의 간격을 의식하면서 그 <사이>에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다. 그리고 그 여백에서 공통의 의미 세계를 빚어내고 누릴 수 있는 여유다. 자연이나 예술에 심취할 때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면서 자기가 사랑스러워지듯이, 마음 깊숙한 곳에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기운을 끌어내고 모아갈 때 삶은 위대한 은총으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