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동서를 관통하는 휴전선. 이곳과 맞닿아 있는 접경지역에서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안다. 전방에서 군대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빨간색 삼각 표지판이 무얼 의미하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섬뜩하고 두려운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말이다.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화창한 봄날, 유년기 강원도 접경지역 고향 마을에서 들은 천둥소리는 사달이 났음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마을 어귀 큰 길가에는 어김없이 옷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남아있는 누군가가 보살핌을 받으며 긴급 수송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림에 보태려고, 반찬거리로 쓰려고 고사리를 꺾으러 산으로 갔다가 당한 사고라고 했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모여들던 우리에게 마을 어른들은 단호하게 강조했다. “빨간색 삼각 표지판이 걸려 있는 철조망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 마을 근처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던 빨간색 삼각 표지판은 선홍색 핏자국과 어른들의 경고와 겹치며 머릿속에 두려움으로 각인돼 갔다.영어 단어를 사전에서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는 재미를 알아가던 중학교 시절.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됐다. 빨간색 삼각 표지판에 하얀색으로 도드라지게 쓰여 있던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MINE. 지뢰였다. 군대 생활을 통해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되면서, 정전을 앞두고 적군의 이동을 막으려고 고향 지역 곳곳에 무차별적으로 설치됐음을 전사(戰史)에서 접하면서 무탈하게 보낸 나의 유년기는 행운 그 자체였음도 깨닫게 됐다.초등학교 이후 고향을 떠나 유학길에 오른 까닭에 철조망에 걸린 빨간색 삼각 표지판을 접할 기회도 사라졌다. 고향 마을 주변에 설치된 철조망은 대부분 걷혔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아직도 빨간색 삼각형은 내게 트라우마다. 천둥처럼 커다랗게 들려온 폭발 소리, 마을 어른들의 다급한 목소리, 부상자의 울부짖음, 핏빛으로 물든 옷, 어린 마음의 두근거림과 동의어로 여겨진다.올해 들어 남북관계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접경지역 출향민인 나에게 남북관계 개선은 다른 이들이 느끼는 그것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한반도에 쏠리는 지구촌의 관심, 미국 정치 일정과 북핵 대응의 함수 관계, 한국-미국과 북한-중국의 이해타산,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셈법 등이 아니다. 기억 저쪽 한편에 쌓여 있는 오래된 트라우마를 털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다. 새마을운동, 경제 성장, 민주화로 요약되는 발전 과정에서 지뢰 표지판과 철조망이 상당수 걷혔듯 남북관계 개선이 고향 마을 주변에 일부 남아 있는 철조망과 표지판을 모두 없애줬으면 하는 것이다. 접경지역에서 빨간색 삼각 표지판이 모두 사라진다면 한반도의 허리를 꽁꽁 묶고 있는 휴전선도 풀릴 것이라는 유추도 어렵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남북관계를 개선한다는 것은 정치적·경제적·역사적으로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고차 방정식임은 틀림없다. 안팎으로 매우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수들은 변화한다. 상식과 기존의 관행만으로는 해법이나 전망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렇지만 내게는 일차 방정식이다. 빨간색 삼각 표지판 트라우마를 치유해 줄 수 있는 계기라는 것이다.전쟁은 엄청난 비극이다. 동시대인은 물론이고 상당 기간 이후의 후대에도 강력한 트라우마를 안겨 준다. 6.25는 같은 말을 쓰는 동족끼리의 전쟁이다. 트라우마는 훨씬 강력할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가 오랜 기간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남과 북에 살고 있는 이들이 지금도 떠안고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족화합과 통합의 지름길은 아닌가. 수많은 실개천이 내와 강을 만들고 바다를 이루듯이…. 빨간색 삼각 표지판은 지금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