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2월 갑작스럽게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지만 여러 심한 후유증이 생겨나 투병과 재활을 계속하다가 최근에야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생과 사의 기로에 서기도 했고, 고통스러운 투병과 재활이 이어진 8개월여의 시간은 인생 최대의 시련기였다. 하지만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병이 생겼나를 원망하지 않고 그래도 이 정도로 목숨을 건지고 몸이 회복되어 가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그런 평정심을 가능하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싶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의 앞길과 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일궈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 어두운 절망 속에서도 밝은 희망의 끈을 이어가려는 모습. 거기에서 인간의 고귀한 가치와 힘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고 없이 찾아온 시련을 피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 시련에 대처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를 갖고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내는 태도를 갖는데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나치에게 끌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었던 작가 빅터 프랭클은 힘든 수용소 생활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곧 병에 걸려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이 인간의 면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랭클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우리가 사는 환경은 우리의 뜻대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어진 현실을 원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언제나 나의 태도를 선택하고 나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다.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인 ‘자조’(Self-help)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충실하며 어떠한 어려움도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정신”이라는 점에서 이 같은 생각과 맞물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필자는 생과 사의 기로에서 투병하면서 그동안 그렇게 집착하며 살아왔던 많은 것이 사실은 부질없음을 생각했다. 우리 인간은 예고 없이 닥쳐오는 재앙 앞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우리 인간은 ‘지구의 정복자’라고 큰소리쳐왔지만 예고 없이 닥쳐오는 생명의 위기 앞에서 미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생명의 섭리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너무 많은 욕심을 내지 않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사람마다 행복의 색깔은 다르다. 어떤 사람들에게 행복은 대단한 것을 가져야만 이루어지는 성취의 대상이다. 많은 재산, 높은 지위나 권력, 화려한 명예 같이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는 성취를 해야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처럼 외형적인 성취를 거둔 삶이라고 해서 내면의 행복이 찾아지는 것은 아닐 게다. 아무리 부와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었어도 끝없는 불안과 탐욕의 굴레에 갇혀 피폐한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 평범한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행복이란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 그저 소박하게 자기만의 소소한 기쁨들을 느끼며 마음 편히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 말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나의 행복은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우리 이제라도 새로운 나만의 행복 만들기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지나온 삶이 공허하고, 어차피 마지막에는 바스러질 삶이 허망하게 생각된다 해도, 내가 스스로 만든 행복을 경험하는 지금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먼 데서의 행복을 욕심내지 않고 일상에서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