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음습한 분위기를 풍긴다. 불안감과 행동의 제약이 가져온 우울증을 나타내는 ‘코로나 블루’가 그렇다. 언택트(비대면)로 정상적이지 않은 성장 과정을 겪는 ‘코로나 세대’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비관론에 빠질 필요는 없다. 물론 과도한 낙관론도 자제해야겠지만….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코로나19의 내포와 외연은 위험, 질병, 환자, 고통 죽음만인가. 혹시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측면은 없는가. 정(正)이 있으면 반(反)이 있고 합(合)이 있듯이, 음(陰)과 양(陽), 음양의 조화가 있듯이,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도 있어 계산(=)이 가능하듯이 말이다.코로나19의 가장 큰 사회적 특성은 고립과 단절이다.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 조치 탓이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모임과 어울림과 뭉침의 성향을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성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울력’에서 ‘개발시대 단체 밤샘’을 거쳐 ‘우리가 남이가’에 이른다. 코로나19는 그래서 우리 사회의 일상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 4만 달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럼에도 늘어난 소득만큼의 삶을 오롯이 즐기지는 못했다. 상사의 눈치를 보고, 후배를 챙기고, 자신의 목표도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감은 잦은 회식과 야근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주52 시간 근무도 비슷하다. 시간적 여유는 가능해졌지만, 저녁이 있는 삶이나 워라벨(일과 생활의 균형)을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인식의 저변에 막연하게 깔린 뭉쳐야 산다는 심리, ‘라떼’(나 때는 그랬지)라는 관행은 단체회식 차수를 줄이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했다. 회식 없는 직장 생활은 언감생심에 난감 무지였다.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은 단절을 전제로 한다. 천동설을 과감히 잘라내고 지동설로 대체한 것처럼 말이다. 코로나19는 발생 이전과 이후를 단절하고 있다. 오후 9시는 저녁 식사를 시작할 수도 있는 시간이 아니라 식당에서 나와야 하는 때로 바꿨다. 2차와 3차로 이어지던 회식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식사 약속마저 취소시키고 있다. 경제적·사회적으로 여간 큰 충격이 아니다.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면서 방역 대책의 강도도 세졌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3단계 같은 2.5단계로 강화됐다.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회식 취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반강제적인 귀가 조처가 이뤄진 것에 다름 아니다. 사회 구성원 전체에 대한 강제적 귀가는 개인에게는 강제적 여가로 귀결된다. 같이할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까닭이다. 최근 회원으로 가입한 누리소통망(SNS) 대화방에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힘든 요즈음, 하고 싶은 일들은 어떤 건가요.” 외국어 공부, 인문학 서적 독서, 가족과 잘 지내기 등이 주류를 이뤘다.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를 털고, 가장의 부담을 줄여보겠다는 취지겠지만 오지 여행도 눈에 띄었다.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워 의미 있게’ 여가를 보내겠다는 의미로 여겨졌다.한국은 초고령화 사회를 코앞에 두고 있다. 퇴직한 베이비붐 세대에게 건강한 사회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인구학자들이 주문하는 배경이다. ‘코로나19 거리 두기’를 ‘가족과 시간 보내기’로 쓰면 어렵지 않다. 강제 귀가를 자발적 여가로 활용하면 된다. 눈치 보기가 아니라 당당한 자존감 실현이어야 한다. 타율적 순응이 아닌 자율적 적응으로 가능하다. 매몰이 아닌 집중으로 균형을 잡으면 된다. 관행이라는 허물 대신 변혁의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충분하다.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사회적 통합이다. 가장과 가족 구성원의 화목은 사회적 통합으로 가는 지름길 일 수 있다. 코로나19를 정반합, 음양의 조화, 플러스마이너스의 균형, 저녁이 있는 삶, 사회적 통합의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원론적 수준의 당연한 답변이겠지만 ‘이 또한 우리하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