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많은 공과대학에서는 졸업생들에게 '철 반지‘(iron ring)라는 것을 기념품으로 선물한다. 1920년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인데, 전문가로서의 윤리의식과 책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1907년 퀘벡 다리를 건설하던 중 잘못된 설계 때문에 붕괴해 75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엔지니어의 불성실함이 빚어낸 그 참사를 잊지 않고자 이 반지를 만들어 끼기 시작했다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다. 반지의 정확한 기원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것을 통해 전문가의 소명을 일깨우는 상징성이 핵심이다. 실패를 뼈아프게 반성하고 거듭나겠다는 다짐이다. 미국의 대형 의류업체 스팽스를 운영하는 사라 블레이클리회장은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주 거론된다.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가 매일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오늘은 어떤 실패를 했니? 라고 물었다. 그날 실패한 것이 없다고 하면 아버지는 실망스러워했다고 한다. 반대로 “오늘 이걸 못하고 말았어요”라고 머뭇거리면 아버지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고 한다.모든 동물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한다. 다른 동물들은 그 경험이 어린 시절에 거의 압축적으로 일어나는 데 비해, 인간은 평생에 걸쳐 좌충우돌을 반복한다. 그 과정을 통해 향상과 진보를 꾀하려면, 그 상황을 면밀하게 반추하면서 오류의 원인을 찾고 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그 작업을 회피한다. 후회, 자책, 수치심, 억울함 등 실패가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감정들 때문이다. 그 결과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비슷한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일본의 하타무라 요타로 교수는 [실패를 감추는 사람 실패를 살리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창조력의 결여는 실패에 직면했을 때 현명하게 대처할 수 없게 한다. 진정한 창조는 눈앞의 실패를 인정하고 이에 맞서는 데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어난 실패를 직시하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사고’, ‘예측할 수 없던 사고’란 변명으로 얼버무리며, 실패의 원인을 ‘미지와의 조우’라고 선언하면서 책임 회피를 반복한다면, 이는 또 다른 실패의 도화선이 될 것이다. 나아가 실패를 성장과 발전의 씨앗으로 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왜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까. 무엇이 그에 대한 직시를 가로막는가. 관련자들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쏟아지게 될 질책과 비난을 두려워한다. 설령 발각되지 않는다 해도 양심의 가책과 자괴감이 따른다. 그래서 최대한 타인이나 다른 부서나 시스템이나 상황의 탓으로 돌리려 안간힘을 쓰게 된다. 실패나 실수를 인정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이 고도 압축 성장을 통해 엄청난 성취를 했지만, 지금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까닭은 사회적 신뢰가 균열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꽃피우게 하는 마음의 토양이 척박해졌기 때문이다.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에도 줄어들지 않는 갑질, 곳곳에서 만연하는 적대 감정과 혐오 발언은 우리의 허약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패와 실수의 경험을 스스럼없이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대등한 인격으로 바라본다는 증거다. 인간적인 결점을 용서하고, 완전하지 않아도 온전할 수 있음을 축복하는 너그러움이 거기에 있다. 그러한 풍토 속에서 실패는 개인적인 부끄러움에서 사회적인 지혜의 원천으로 탈바꿈한다. 실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다. 실패의 경험은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자산이다. 실수는 인간적인 약점이 서로 이어주는 선물, 함께 도약하는 발판으로 될 수 있다. 실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다. 실패의 경험은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