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보았던 네 컷짜리 신문 만화 한 편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고등학생 아들에게 묻는다. “너 뭐 하러 과외로 공부하니?” 아들은 “좋은 대학 갈려고요.”라고 대답한다. 어른은 다시 묻는다. “좋은 대학 가서 뭐 하려고?” 이에 아들은 이렇게 답한다. “과외로 일하려고요.”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 세계를 탐구하고 어른들에게 질문한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환경에 익숙해지고 생각의 집이 건축이 되면서 그러한 지적 스태미나가 서서히 쇠퇴한다. 특히 학교에 입학하고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여러 가지 지식이 딱딱한 형식으로 주입될수록 안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호기심이 줄어든다. 공부가 대입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대학 공부마저 취업을 위한 시험 준비로 획일화되는 상황에서 지성은 거의 실종되어 버린다. 도구화된 공부는 열정을 수반하기 어렵다. 삶과 무관하게 보이는 지식을 강요받으면서 학업에 대한 냉소주의가 싹튼다.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떤 고기를 얼마만큼 잡을 것인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체력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다가 과로로 쓰러질 수 있고, 너무 많이 잡아 올린 고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그물이 찢어지거나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 또는 너무 촘촘한 그물망으로 어린 새끼들까지 싹쓸이하는 바람에 씨가 마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의 교육이 그런 마구잡이 어획과 비슷한 지경이 아닌가 싶다.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나는 어떤 고기를, 왜 잡는가? 내가 먹기 위해서인가? 팔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조상 대대로 해온 일이고, 아버지가 잡으라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잡으러 다니니까? 고기잡이가 왠지 멋있어 보여서? 고기잡이 말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내가 먹지 않고 내다 팔기 위해서 잡는다면, 그렇게 번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평범한 어부에게 이런 질문은 자명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이지만, 고기잡이를 교육에 비유할 때는 짚어보아야 할 문제들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묻지 마’ 공부에 매진하는 청소년들에게 특별히 절실한 물음이다. 자아 정체성을 건설해가는 사춘기에 내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보지 않으면, 방향 감각을 잃고 ‘나’ 아닌 것들의 힘에 휩쓸리게 된다. 미국의 일류대학에 진학한 한국의 젊은이들의 중도탈락률이 가장 높은 것, 수많은 엘리트가 몇몇 직종으로 대거 몰리는 것도 바로 그러한 자기 형성의 과정을 생략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한 공백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생애를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데 장애가 된다. 인간의 잠재력은 언제든 발굴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로잡는 그 무엇을 우선 만나야 한다. 저절로 몰입할 수 있는 공부나 활동 말이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삶의 반경이 넓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 길고 고된 여정을 즐겁게 이어갈 수 있는 내공이 요청된다. 그것을 갖으려고 단순히 의지만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도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이 언젠가 도달해 있을 상태, 지금과는 사뭇 다른 대견한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이다.그렇게 해서 명료해지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자연스럽게 몰입이 일어난다. 몰입은 그 자체로 행복의 원천이 된다. 그것은 중독과 다르다.중독은 의존성이 강하고 그래서 수동적으로 끌려간다. 반면에 몰입은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자아를 고양하는 체험이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자극에 길들고 소비에서만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 몰입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버거운 과정을 통과하면서 향상되는 자신의 모습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이다. 자신의 일상을 관찰하고 경험을 돌아보자. 그리고 차분하게 도전해보자.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