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초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스키에 의한 원근법의 발견은 사물을 보는 관점에 혁명을 가져왔다. 멀리 떨어진 것일수록 작아 보이도록 그리는 원근법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잊혀졌던 것이다.15세기 르네상스와 더불어 원근법의 재발견과 확산은 그런 점에서 보면 ‘신’이란 타자의 눈에서 ‘사람’인 나의 눈으로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원근법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멀고 가까움을 구분하지 않는 조선시대의 그림이나 앞뒤가 불분명한 고대 이집트의 그림을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생각한다. 이러한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옛 사람들이 참으로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그림이 반드시 원근법으로만 표현되어야만 옳은 게 아니다. 건물의 설계도면은 건축주가 바라는 건축공간의 구성을 스케일을 축소해 정확하게 표시해 놓는다. 거기엔 원근법이 없고, 또한 불필요하다. 원근법은 보는 것을 옮겨놓을 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을 철저하게 배재하거나 숨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 배제와 은닉은 차별과 선택의 다른 표현일 수 있지만 관찰자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되고 의도된 것이다. 이는 과학이란 것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 권력, 도덕의 문제를 낳는다. 옛 오스만 터기에서는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신성모독이라 하여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보는 의도’의 불경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원근법에 너무 익숙한 방식으로 공간현상을 인식하고 또한 이를 그림 등으로 옮겨 놓다. 그렇지 않을 경우(보는 것과 다른 경우)는 신성모독이 되는 시대가 되어 있다.원근법적 인식, 즉 보는 것(seeing)으로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이 보편화되면서, 우리는 공간 속 사물의 배열도 이에 맞게 보이도록(being seen)한다. 사람의 체면은 ‘남에게 보이는 면’을 중심으로 하여 그 사람의 됨됨이가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도시 건축물의 앞면인 파사드(facade)를 화려하게 꾸민 것도 보이는 것으로 해당 건축물의 가치를 판가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후기 근대인 오늘날은 보는 것보다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다.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눈(시각)이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함이다. ‘보이는 것’의 특질, 즉 가시성은 바라보는 이의 인식과 관찰 틀을 거꾸로 결정한다. 공간철학자 르페브르(Lefebvre)에 의하면, 남성우월주의란 권력은 시각적으로 수직적이거나 높은 위치(heights)란 가시성을 통해 행사된다고 한다. 수직이란 높이의 시각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남성의 권위를 받아드리도록 규정한다는 뜻이다. 광고가 만든 의미지가 상품에 대한 소비자(보는 자)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도 가시성이 보는 것을 거꾸로 규정하는 예다. 보는 것 보다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해지면서 일상세계는 온통 환영적인 것(spectacle)으로 채워지고, 또한 이는 거꾸로 힘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기 드보르(Guy Debord)는 이러한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라 부른다. 주체가 보는 것 보다 객체에 의해 보이는 것이 더 힘을 발휘하는 사회에선 허상, 이미지, 가식성이 판을 친다. 객체의 보이는 것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내가 중심(주체)이 되지 못한다. 이는 세계로부터, 나로부터 소외를 전면화 시킨다. 우리 사회도 ‘보는 것’ 보다 ‘보이는 것’이 더 우월해지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보고픈 걸 보는 사회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