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원호대상자”라는 호칭을 들으며 자랐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도움과 보살핌을 받는다는 뜻을 지닌 "원호"라는 호칭이 싫었다.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겠지만, 내성적인 성격을 타고난 나로서는 특히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1932년생인 아버지는 1933년생인 어머니와 중매로 결혼하여 사시던 중 6.25의 발발로 임신 중인 아내를 남겨두고 군에 입대하셨다.
1952년 3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전쟁 중에 사병이 득남을 이유로 휴가를 가는 규정이 없었기에 아버지는 그대로 복무하다가 1953년 3월 전사하셨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는 “전몰군경미망인”이 되셨고, 나는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한 유복자나 다름없는 “전몰군경유자녀”로 자랐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전사자의 유가족을, 혹은 부상을 당한 상이군경을 어쩌다 “도움과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원호대상자”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 유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호칭을 듣는 전몰군경미망인이나 전몰군경유자녀, 상이군경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게 얼마나 부적절한 호칭인지를 쉽게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때 경제학 교수님을 만났다. 당시에는 단과 대학들이 각각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재학생을 통틀어 480명뿐인 법과대학에도 경제학, 재정학 등 타 전공 교수님이 계셨다. 경제학 전공의 대학원생이 없는 법대에서 조교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경제학 교수님은 시골 출신인 내게 당신의 조교가 되어 경제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경제기획원에 가라고 권유하셨다. 그 은사님 덕분에 고희가 된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한편, 대학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한 1975년 정부의 행시 출신들에 대한 수습 방침이 바뀌었다. 행정사무관 시보를 곧바로 중앙부처에 배치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처음 1년은 군청에서 수습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 방침에 따라 나는 전라북도 정읍군청 수습행정관으로 발령받았고 당시 군수님의 배려로 새마을과장 경험을 하며 행정을 배우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인기 부처였던 경제기획원 또한 신규 사무관을 곧바로 받지 않고 다른 부처 경험을 한 사람 가운데 선발하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수습 후에도 다른 부처 근무가 불가피했다. 그런데 발령받은 부처가 하필 원호처였다. 원호대상자로 자란 내가 원호처 공무원으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원호처장님도 신규 전입자는 일선 경험을 먼저 하게 하는 방침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1976년 5월 광주지방원호청 관리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1977년 5월 경제기획원으로 옮길 때까지 1년 동안 원호처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원호대상자로 자란 내가 대학 졸업 후 원호처 공무원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다. 이왕에 왔으니 원호대상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공무원이 되자는 마음가짐으로 1년을 보람 있게 보낸 추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1984년 정부는 정부조직법을 고쳐서 “원호처”라는 이름을 “국가보훈처”로 바꿨다. 이는 단순히 중앙행정기관 명칭 변경을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 나라를 지키다 희생한 전몰군경, 유가족, 상이군경 모두 거저 도움과 보살핌을 받는 대상이 아니다. “국가보훈처”라는 이름에는 국가유공자 및 그 유가족과 상이군경의 희생에 보답한다는 의미의 "보훈"을 담고 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를 지켜내면(호국) 뒤에 남은 가족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걸(보훈) 보여줄 때 “국가안보”는 더욱 튼튼해질 수 있다.
국가보훈처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호국보훈 의식을 함양하기 위하여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했다. 호국보훈의 달 현충일에 해 뜰 녘 조기를 게양하고 해 질 녘 태극기를 내리며 <안보 교육>의 핵심은 국가유공자의 희생에 보답하는 <보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