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혐오시설’로 여겨지는 것이 많다. 노인 병원, 화장장, 장애인 학교 등이 그것으로 건립 과정에서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힌다. 2017년에 강서구 장애인학교가 들어서려 할 때 주민들의 ‘결사’ 반대에 부딪혔고, 그 학교 어머니들이 무릎을 꿇고 설립을 허락해달라고 애원한 일이 화제가 된 바 있다. 거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어느 어머니가 주민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우리 아이들이 왜 그렇게 싫으냐고, 무엇이 문제냐고.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누군가가 궁색한 답을 내놓았다. 그냥 보기 싫다.혐오는 그 대상이 되는 타인이나 집단을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피상적인 차이를 절대시하면서 이질화하고 비하하면서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심성이 거기에 깔렸다. 따라서 그러한 경계를 상대화하면서 같은 인간으로서 접속하여 소통하고 더 나아가 삶을 나누는 기회를 줘야 한다. 예술 활동이나 자원봉사를 펼치면서 또는 어떤 공동의 과제를 해결해나가면서 서로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주문이 틀릴 수도 있는 식당’이라는 독특한 음식점이 화제가 되고 있다. 손님이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올 수 있음을 미리 알려주는 것인데, 종업원들이 치매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이용객들은 그분들의 인지 장애를 오히려 놀이적인 감각으로 수용하기에 기꺼이 소비자가 되어준다. 그럼으로써 경도 치매 노인들이 사회적인 연결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산본고등학교의 사례도 시사적이다. 그 학교는 특성화고등학교인데, 인문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역에서 백안시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일부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켜 주민들은 늘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교회가 중심이 되어 조식을 거르고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아침밥을 해주는 봉사가 시작되면서 관계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른들에 대한 감사가 아이들의 마음과 표정과 행동을 부드럽게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는 매점과 카페에 인근 주민들이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교감이 이뤄지고, 다정한 이웃으로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끼리끼리 어울리고 뭉치면서 부질없는 경계를 치고 장벽을 쌓아갈 때, 근거 없는 혐오 감정이 싹트고 퍼져 나가기 쉽다.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맞아들이는 환대에서 그 감정은 극복된다. 공감의 지대가 넓어지면서 방어 태세를 풀고 무장을 해제할 수 있다. 타인에게 열린 가슴으로 공동체적 유대를 맺고 시민적 공공 영역을 넓힐 수 있다. 공동체와 시민적 공공성은 궁극적으로 자기에 대한 관용과 연민을 수반한다. 자신의 취약함과 그늘을 인정하고 자기 검열 없이 타인을 대할 수 있는 안전한 관계가 창출되는 것이다. 그러한 공간에서는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특질이 오히려 개성으로 부각되고 소수자들 사이의 유대를 맺어주는 실마리가 된다. 프랑스에서 비만 여성들이 ‘빅사이즈 패션쇼’를 열어 획일적인 심미 감각에 도전하고 있는데, 새로운 정체성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가운데 자존감을 세우는 문화 실천이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사회화될 수 있고, 그것이 방어막이 되어 혐오 표현의 피해자가 되는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정치적인 민주화의 결과 한국사회는 많은 것이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경제 성장 덕분에 소비 수준도 높아졌고, 정보 혁명 속에서 엄청난 검색과 통신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그것이 삶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 못한고 오히려 사회적인 억압과 갈등을 낳는다면, 내면이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직면하지 않고 불안한 마음으로 타인을 배척하고 짓누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우정으로 연대할 수 있는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생명의 기운을 서로 북돋으면서 공적 행복감을 누리는 길을 여러 갈래로 만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