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서 어른들이 손자나 나이 어린 조카들에게 흔히 하던 덕담이다. 초중고 시절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들의 훈화 또한 인격의 훌륭함에 관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훌륭함에 관한 덕담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좋은 대학 가라, 좋은 회사 취직해라, 돈 많이 벌어라” 등등 덕담 아닌 덕담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세태가 변한 것이고 그 변한 세태가 덕담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훌륭함’의 가치는 실종됐다.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크게 나눈다면 ‘뛰어남’과 ‘훌륭함’으로 요약될 수 있다. ‘훌륭함’은 일종의 도덕적 가치로서 그 자체 ‘좋음’을 뜻한다. 반면 ‘뛰어남’은 비교적 우위, 상대적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남의 추구는 불가피하게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각축을 불러일으킨다. 경쟁제도는 이러한 각축의 폐해를 줄이는 가운데 각자의 욕망을 긍정하고 장려함으로써 최대치의 성과를 확보하고자 고안된 사회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비교적 짧은 기간 지난 세월의 가난과 약소국의 설움을 극복하게 된 것은 경쟁을 통한 뛰어남의 추구를 집단적 가치로서 체화해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기적에 가까운 상당한 성과를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 바로바로 ‘훌륭함’이라는 가치다. ‘훌륭함’이란 경쟁을 통해 발현되지 않는다. ‘훌륭함’의 추구에는 이긴 자와 패배한 자의 이분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뛰어남’에는 ‘이전’과 ‘이후’의 단절이 불가피하다. 뛰어남은 곧 도약이며, 비약이기 때문이다. 뛰어남의 추구가 단절적인 도약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훌륭함’의 추구는 반대로 연속과 지속을 바탕으로 한다. ‘훌륭함’은 본질적으로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모방적 행위로서, 모범이란 이전 시대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사회가 경쟁을 통한 뛰어남의 추구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해오면서도 서바이벌 게임(survival game)과 같은 파국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함이란 가치를 늘 함께 추구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보더라도 반드시 ‘뛰어난’ 인물들만은 아니다. 상당수는 뛰어나기보다는 ‘훌륭함’으로 기억되는 인물들이다. ‘훌륭함’은 사회가 개인들의 ‘각축장’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임을 다시금 확인케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과거와 미래가 배제된 ‘현재만의 시간’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함께 공존하는 ‘지속적 현재’라는 것을 환기시켜주는 도덕적 가치다. 한 사회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경제자본과 인적 자본만이 아니다. 21세기 경제학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사회자본이다. 사회자본은 국가와 정부에 대한 신뢰 그리고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 협력, 연대 등과 같은 무형의 자본이다. 최근의 한 자료를 보면 경제자본과 인적자본에서 한국은 선진국 수준이지만 사회자본에서 한국은 중하위권 수준이다. 심지어 세계 36개국 중학교 2학년생을 대상으로 정부와 학교에 대한 신뢰를 비롯하여 사회적 협력, 관계지향성 등을 묻는 조사에서는 한국은 35위를 했다. (『중앙선데이』 2018년 9월1-2일, 스페셜 리포트 참조)새마을운동은 ‘잘살아보세’라는 집단적 염원이 그 출발이었다. 그 염원은 나만 잘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잘살고자 한 것이었고,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여 잘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공동체 정신과 협동 그것은 곧 훌륭함을 실천하는 일이었으며, 새마을운동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사회자본이었다. 이제 그간 세월을 성찰하면서 ‘뛰어난 발전’의 과정에서 망각하고 있었던 ‘훌륭함’의 가치를 돌아볼 때이다. 우리 사회의 물질적 성장을 정신적 성숙으로 바꾸어 가기 위한 제2의 새마을운동, 새마을정신 2.0의 출현을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