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독일의 공습에 연일 시달리던 때의 일이다. 런던의 어느 백화점이 폭격으로 일부가 파괴되어 큰 구멍이 나버렸다. 다음 날 입구에 이런 안내판이 걸렸다. ‘오늘부터 입구를 확장합니다.’ 버킹엄궁이 폭격당했을 때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폭격을 당해서 다행이다. 왕실과 국민 사이를 가로 박고 있던 벽이 사라졌다. 이제 폭격에 희생당한 국민 볼 면목이 생겼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이렇듯 깜찍한 위트를 발휘하다니. 결과론적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영국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맷집은 바로 그런 마음의 여유에서 생기지 않았을까. 상황이 절박할수록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점점 비좁은 시야에 갇히기 일쑤다. 유머는 사태에 매몰되지 않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을 열어준다.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으로 ‘방어기제’라는 것이 있다. 스트레스나 불안이 엄습하거나 수치심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자아가 붕괴되는 듯한 좌절감에 노출될 때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법을 말한다. 이성적으로 마음을 통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채택하는 사고 및 행동 수단이다. 정신과 전문의 조지 베일런트는 하버드 대학 졸업생 등 8백여 명의 삶을 70년 동안 추적하면서 인간의 행복을 연구하여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을 내놓았는데, 거기에서도 방어기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방어기제를 ‘스스로 인정하는가 부정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실제 삶을 얼마든지 가공하고 왜곡할 수 있는 무의식적 생각과 행동’이라고 정의하면서, 미성숙한 것과 성숙한 것으로 대비시킨다. 미성숙한 방어기제는 투사, 수동적 공격성, 해리(解離), 행동화 acting out(벌컥 분노를 터뜨리는 것), 환상, 자기도취, 사디즘, 마조히즘, 편견, 흠 잡기, 범죄, 아동 학대, 과음, 무관심 등으로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고 도피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에 비해 성숙한 방어기제는 ‘소소하게 불쾌한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고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된다. 그는 네 가지를 꼽는데 승화, 유머, 이타주의, 억제가 그것이다. 유머가 성숙한 방어기제가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뜬금없는 욕망이나 판타지로 현상을 덮어씌우면서 본질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 그 대신 멀리서 바라보면서 습관적인 반응이나 사회 통념의 포로가 되지 않고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는 점이다. 실패했거나 난관에 부닥쳤을 때 중요한 것은 사태를 직시하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 태도를 양립시키기가 무척 어렵다. 상황을 정직하게 인식하면 죄책감과 자기 비하에 빠지기 쉽고, 애꿎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면 억지 논리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진실을 회피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머는 현실을 담백하고 경쾌하게 수용함으로써(억지로 유쾌한 척하는 ‘해리’ 증상과 전혀 다른 것),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고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마음의 길을 열어준다.‘환하게 웃는 자만이 현실을 가볍게 넘어설 수 있다. 맞서 이기는 게 아니라 가볍게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고 니체가 말했다. ‘웃어넘기다’라는 말이 있다. ‘울어 넘기다’ ‘화내서 넘기다’ 같은 말은 없다. 웃음은 눈앞의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장애물을 넘어서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미지의 것에 대한 상상으로 기존 세계를 의문에 부치고, 정직한 각성으로 삶을 긍정하는 지혜와 용기가 거기에서 나온다. 권력과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는 기백, 자기 자신의 욕망이나 두려움과도 거리를 둘 수 있는 초연함이 유머가 주는 선물 아닐까. ‘연속된 시간, 끝도 없는 시간이 힘겹게 느껴지면,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일순간 거기에서 벗어나 부조리의 위안을 찾는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