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얼핏 좋은 삶이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지만, 충분한 답은 아닌 것 같다. 행복은 때로 주관적인 감정 상태를 의미하고, 행복의 기준이나 척도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들에 핀 한 송이 꽃이 일순간 행복감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 행복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무덤덤한 일상으로만 느껴질 수도 있다. 좋은 삶이란 분명히 ‘행복한 삶’ 이상의 어떤 것이다. 좋은 삶이 어떤 삶인가를 구체적 사례를 들어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좋은 삶을 이루는 필요조건에 대해서는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삶의 한 가지 필요조건은 좋은 사회다. 좋은 사회 없이 한 개인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불 속에서 얼음을 찾는 것만큼 어불성설이다. 사실 좋은 삶과 좋은 사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앤드류 올렌즈키에 따르면 “인간 사회는 개인의 집단적 행동에 의해 형성되므로, 사회는 각 개인이 가진 마음의 특징이 반영된다. 사람들의 마음속 평화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고 사람들의 마음속 혼란은 세계에 혼란을 일으킨다.” (『붓다마인드』 중에서). 물론 나의 평화가 곧 세상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평화 없이 세상의 평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마찬가지로 사회가 개인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경쟁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개인들에게 도덕적 자제심을 발휘해서 양보하고 배려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좋은 삶이란 좋은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의미를 개인의 완성 후 사회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순차적인 수양의 과정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개인의 완성과 사회의 완성은 동시적이어야 한다. 좋은 사회가 좋은 삶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어느 신학자의 말을 원용하자면, 지금 대한민국은 파도 아래로 가라앉는 타이타닉호 위에서 이리저리 편 갈라 싸우는 모양새다. 어떤 이들은 하급선원의 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비싼 표를 구입한 일등선 승객에 대한 서비스를 개선하라고 아우성이다. 저마다 권리를 주장하면서 가라앉는 배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새마을운동은 원래 공동체적 가치관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나만이 잘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고자 한 것이었고, 나의 발전과 공동체의 발전이 둘이 아님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은 그 실천을 위한 구체적 강령이었다. 근면이 부재한 협동, 협동이 부재한 자조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근면은 곧 협동을 의미했고, 협동은 곧 자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은 삼위일체로서 ‘함께’ 잘 살고자 하는 새마을 정신의 구체적 실천이었다. 이제 새마을운동은 생명·평화·공경운동을 통해 새로운 문명사회를 이루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시의 적절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절대적 빈곤에서는 벗어났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빈곤하다. 어쩌면 가난했던 그 시절 보다 더 빈곤한 마음들이다. 말은 거칠고 행동은 더 잔혹해졌다. 인간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의 문제다. 인간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 빈곤한 마음들, 거칠고 잔인한 행위들 속에서 이런 관계들이 다 망가지고 있다.더 망가지기 전에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복원해야 한다. 생명·평화·공경운동은 그 복원의 출발이자 목표이다. 생명·평화·공경은 각각 개별적 실천 덕목이 아니라 삼위일체로서 서로 연결된 실천들이다. 근면, 자조, 협동이 삼위일체로서 나의 발전과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 생명·평화·공경운동은 좋은 삶 그리고 좋은 사회를 위한 출발점이자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