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컷>(로빈 윌리엄스 주연, 2004)이라는 영화가 있다. 먼 미래에 있을법한 상황을 설정하여 삶의 속살을 들추는 작품으로 인간의 기억과 그 기록을 소재로 하고 있다. 어느 첨단기술 개발회사에서 특허품으로 내놓은 ‘조이칩’을 뇌에 심어놓으면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이 고스란히 기록된다. 저장되는 데이터는 시각 영상이다. 즉, 그 사람이 눈을 뜨고 생활하는 동안 시야에 들어온 장면이 모조리 녹화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유명 인사나 부호들이 죽은 이후에 유족들의 의뢰를 받아 고인의 조이칩에 담긴 자료를 꺼내어 편집하는 일을 한다. 부도덕한 일들은 모두 지우고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만한 장면들만 골라서 미화하는 것이 임무다. 그렇게 해서 제작한 영상물은 1주기 추도식에서 공개되고, 참석자들은 고인의 숭고한 생애에 탄복한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도 자신의 뇌에 조이칩이 심어져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인생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장면들의 파노라마로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어떤 사고나 자살 등으로 높은 곳에서 추락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평생의 기억들이 낱낱이 뇌리에서 재생된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본 것은 상당 부분 망각되는 듯해도 어딘가에 모두 저장된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축적되어 의식 그리고 무의식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프랑스의 요리사 앙텔름 브리야 사바레가 한 말을 이렇게 변용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무엇을 보는지를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내가 보는 것이 곧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가난과 범죄와 인종차별을 겪으며 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의 작가 엔지 토마스는 도서관을 처음 접한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린다. “6살 때, 공원에서 두 명의 마약상이 총격전을 벌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서부영화 속 장면 같았죠. 다음 날 엄마가 저를 도서관에 데려가셨어요. 그날 눈앞에서 본 것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죠.”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대출하거나 독서하는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준비하는 모태라고 작가의 어머니는 생각한 것이다. 유년 시절의 경험은 생애 전체의 바탕 화면을 구성하는데, 그 시기에 눈으로 보는 것이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멀쩡히 눈앞을 볼 수 있는데도 애써 눈을 감는 경우도 있다. 함석헌 선생이 오산학교에 재직하고 계실 때,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바람이 불어서 자기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교사들을 지목해서 벌을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중국의 문화혁명 때 홍위병처럼 폭력도 불사했다. 함석헌 선생도 대상자로 분류되어 학생들이 교무실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때리려고 하자 그는 얼굴을 감싸고 엎드렸다고 한다. 그런 행동을 의아하게 여긴 학생들이 함석헌에게 이유를 물었다. 선생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도 사람인데 너희 얼굴을 보면서 맞으면 나중에 너희 얼굴을 내가 어찌 보겠느냐? 이대로 맞겠다.” 이에 학생들은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사람이 눈으로 본 것은 모두 뇌의 어딘가에 저장된다고 한다. 의식에서는 완전히 지워진 듯해도 무의식 속에서는 흔적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기억 칩 속에는 어떤 장면들이 입력되어 있는가.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얼마나 되는가. 충만한 시간을 함께 누린 사람은 누구인가. 어쩌다 사진첩에서 빛바랜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세월의 나이테를 더듬어 옹이(나무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든다.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힘겨운 생애의 발걸음을 딛고 나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 그 오래된 미래를 놓아가는 여정인 것이다.